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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민주주의 - 3장 다중의 민주주의

당신에게 힘이 함께 하기를 May The Force Be With You

 

[341.1] 1부 논의 정리 : 일반적이고 항구적인 전지구적 전쟁상태

주권 관계에서 균형이 다중 쪽으로 기움에 따라, 모든 비민주적 권력은 전쟁과 폭력을 자신의 기초로서 필요로 하기에 이른다. 전쟁은 더 이상 정치권력이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 자체가 정치 체제의 토대를 규정하는 경향이 우세해진다. 폭력은 더 이상 법적 구조들 혹은 도덕적 원칙들을 기초로 해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정당화는 폭력의 효과, 즉 폭력이 가진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해서 사후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기초인 폭력이 맨 앞에 오고, 정치적/도덕적 협상이 그 결과로서 뒤따른다. 민주주의의 가능성들의 출현은 주권으로 하여금 훨씬 더 순수한 형태의 지배와 폭력을 채택하도록 강제한다.

 

[341.2] “탈주하라, 그러나 탈주하면서 무기를 움켜쥐어라

순전히 대칭적인 관점에서 사고하면, 민주주의를 주권의 항구적인 전쟁에 대한 대립물, 즉 절대적으로 평화적인 힘으로 제기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 대립은 좀처럼 우리의 현실적 조건과 부합하지 않는다. 오늘날 새로이 출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힘은 단순히 무시할 수 없는, 혹은 그저 없어지기를 빌 수만은 없는 폭력의 상황에 놓여있다. 민주주의는 오늘날 주권으로부터의 이탈, 탈주, 엑소더스라는 형태를 취하지만, 엑소더스를 행하는 다중이 주권권력의 억압적 폭력에 폭력의 절대적 결여로 맞서면서 주권의 공격에 대칭적인 대립물로써 대응한다는 식의 평화주의적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엑소더스는 결코 평화주의적이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평화주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엑소더스는 능동적인 저항을, 주권의 추격하는 힘들에 맞선 후위전쟁을 필요로 한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탈주하라, 그러나 탈주하면서 무기를 움켜쥐어라.”

 

[342.1] 민주주의적 폭력, 전쟁에 대한 전쟁이란 무엇인가

엑소더스와 민주주의의 출현은 그래서 전쟁에 대한 전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개념적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만약 민주주의가 주권과 대립되는 전략을 취할 수 없다면, 그리고 주권의 영구적인 전쟁에 맞서 순수한 평화주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혼란은 대립물들로 사고할 수밖에 없을 때에만 발생한다. 무력과 폭력의 민주적 활용은 주권의 전쟁과 동일하지 않고 그 대립물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다(it is different).

 

[342.2] 폭력의 민주적 활용 원칙 1 - 폭력의 정치에의 종속

새로운 주권형태에서는 전쟁이 일차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정치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폭력을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해야 한다(사빠띠스따의 예). 이처럼 폭력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이 그 자체로 폭력의 사용이 민주적으로 되는 데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기는 하다.

 

[343.1] 폭력의 민주적 활용 원칙 2 방어적 폭력

폭력의 민주적 활용의 두 번째 원칙은 폭력이 오직 방어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파라오의 추격대에 맞선 유대인들의 이미지, 나치에 맞선 바르샤바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반란). 이러한 폭력의 방어적 사용 원칙은 폭정에 맞서 저항할 권리라는 오래된 공화주의적 전통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화주의적 저항권이 바로 무기소유 및 소지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미국 수정헌법 제2조의 실질적 의미다. 즉 수정헌법 제2조의 개념적 기원은 통상적으로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폭정에 맞서 저항할 다중의 권리, ‘무장한 인민의 권리에 입각해있는 것이다. 196752일 블랙팬서 조직원들이 흑인공동체를 방어할 헌법상의 권리를 선언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의회 건물에 총을 가지고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이 권리의 정신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저항의 적합한 형태가 역사적으로 변화하며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따라 창안되어야 한다는 것을, 특히 총이 더 이상 방어에 적합한 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총이 아니라 다른 무기가 필요하다.

 

[344.1] 두 번째 원칙의 보론 - 저항으로서의 폭력

이러한 방어적 폭력의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중요한 명제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것을 보존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약한 폭력관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이러한 의미의 폭력은, 벤야민이 이야기한 법을 정초하는 신화적 폭력이나 법을 파괴하는 신성한 폭력이 갖고 있는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민주적 폭력은 오로지 사회를 방어할 수 있을 뿐 창조하지는 못한다. 이는 혁명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적 폭력은 혁명적 과정을 열어젖히지 못하고 오히려 마지막에만, 즉 정치적/사회적 변형이 이미 시작되었을 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적 맥락에서 폭력을 민주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항의 행동과 그리 다르지 않다.

 

[344.2] 두 번째 원칙의 두 번째 보론 - 방어적 폭력을 가장한 침략과 정복

방어적 폭력의 원리가 개념적으로 명확하다 할지라도 실천에서는 종종 매우 혼동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폭력적 침략과 정복이 방어적 조치로 신비화되었던 사례들은 역사 속에 무수히 존재한다(나치의 주데텐 침공, 소련의 헝가리, 체코, 아프가니스탄 침공, 미국의 그라나다 침공, 십자군 원정). 이러한 신비화의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판본은 최근에 학자들, 언론인들, 정치가들이 부활시킨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라는 관념이다. 폭력의 방어적 사용의 원리는 늑대에게 양의 탈을 씌우는 이 모든 신비화들을 부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345.1] 폭력의 민주적 활용 원칙 3 폭력 자체의 민주적 조직화

폭력의 민주적 사용의 세 번째 원칙은 민주적 조직화 자체와 관계되어 있다. 첫 번째 원칙에 따라 폭력의 사용이 항상 정치적 과정과 결정에 종속된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정치적 과정이 다중의 수평적이고 공통적인 형성 속에서 민주적으로 조직된다면, 폭력의 사용 역시 민주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주권권력에 의해 수행된 전쟁은 언제나 자유와 민주주의의 유예를 요구해 왔다. 주권적 군대의 조직된 폭력은 엄격하면서도 의심받지 않는 권위를 요구한다. 이와는 반대로 폭력의 민주적 사용에는 목적과 수단의 분리가 있을 수 없다.

 

[345.2] 무기의 비판 1 무력의 비대칭성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원칙들에 더해, 폭력의 어떠한 민주적 사용도 무기에 대한 비판, 즉 오늘날 어떤 무기가 효과적이고 적합한지에 대한 숙고 또한 포함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엄청난 비대칭성(대량살상무기, 정보와 소통 네트워크를 통한 무기의 정밀성)이 존재하는 폭력의 지형에 소총을 들고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46.1] 무기의 비판 2 테러리즘의 무용성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지배자들의 군사력과 대칭을 이루려하기보다, 현재의 다양한 폭력 형태들의 비극적인 비대칭성 자체를 깨뜨릴 수 있는 무기들이다. 테러리즘은 세계를 더 낫게 만들지 못하며 심지어 권력관계를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배자로 하여금 인권과 삶 자체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 아래로 통일될 필요성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도록 해줄 것이다. 사실 다중의 기획에 적합한 무기는 권력의 무기들과 대칭적 관계도, 비대칭적 관계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반()생산적이자 자멸적이다.

 

[346.2] 무기의 비판 3 두 가지 형태의 순교

이러한 새로운 무기에 대한 성찰은 두 가지 형태의 순교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살폭파범이 그 좋은 사례인 첫 번째 형태는 순교를 불의의 행동에 (자괴파괴를 포함하는) 파괴로써 대응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두 번째 형태의 순교자는 파괴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자들의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형태의 순교는 실로 일종의 증언이다. 그것은 권력의 불의에 대한 증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증언이며, 특정한 파괴적 권력이 아니라 모든 파괴적 권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순교는 사랑의 행동이며, 미래를 목표로 하며, 현재의 주권에 반하는 구성적 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를 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순교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실제적인 정치적 행동과 그것에 대한 주권의 반작용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분명 다른 곳에서 정치적 행동주의를 찾을 필요가 있다.

 

[347.1] 무기의 비판 4 새로운 무기를 창안할 필요성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무기를 창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운 무기를 발견하려는 창조적인 시도들이 많이 존재한다(퀴어네이션의 키스-인스, 지구화 시위, 불법이주).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유용하지만 분명 충분치는 않다. 우리는 파괴적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구성적인 힘의 형태인 무기들을, 민주주의를 구축할 수 있고 제국의 군대를 패배시킬 수 있는 무기들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삶권력의 패배 이후 올 삶정치적 미래에는 전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를, 특이성들 사이의 협력과 소통의 강렬함이 전쟁의 가능성을 파괴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딱 일주일만 전지구적으로 삶정치적 파업을 벌여도 그 어떤 전쟁이든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다중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해줄 뿐 아니라 건설적이고 확장적이고 구성적인 무기를 창안해내는 날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군대를 지휘하는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군대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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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다중의 민주주의

[328.1] 앞 절에서 살펴본, 현재의 전지구적 체제의 불의에 반대하는 운동들과 실천적 개혁 제안들은 민주적 변형의 강력한 힘들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 세계가 제공하는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에 비추어 민주주의 개념을 다시 사유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개념적인 재사유는 이 책의 주요한 과제이다. 하트와 네그리는, 자신들이 다중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기획의 개념적 기초를 만들어내고자 한다고 말한다.

3.3.1 주권과 민주주의

[328.2] ‘오직 일자만이 지배할 수 있다’

정치이론의 전통 전체는 오로지 일자(그것이 군주이든, 국가이든, 민중이든, 당이든)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한 가지 기본적 원리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 및 근대의 정치사상을 형성한 세 가지 전통적인 통치형태들(군주제, 귀족제, 민주주의)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단일한 형태로 환원된다. 하지만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오직 일자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정치사상의 명령이 민주주의 개념을 침식하고 부정한다는 점이다.

[329.1] 정치적인 것의 토대로서 주권 개념

주권 개념은 정치철학의 전통을 지배하며, 항상 일자가 지배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정치적인 것의 토대로 기능한다. 이 전통에 따르면 오직 일자만이 주권일 수 있으며 주권이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 주권인가 아나키인가! 양자택일은 절대적이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복수성과 권력의 분할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언제나 주권의 필요성에 자리를 내준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누군가 지배해야 하고, 누군가 결정해야 한다. 이는 심지어 대중적인 격언들에서조차 강화되어, 하나의 자명한 이치로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시된다.

[329.2] 일자의 지배에 대한 강조

일자에 대한 이 강조는 유럽사상에서 대대로 계승된 플라톤의 유산이라고 설명된다. 일자는 불변하는 존재론적 토대(기원이자 목적, 실체이자 명령)이다. 일자의 지배와 혼돈 사이의 이 잘못된 양자택일은 유럽의 정치철학 및 법철학 전반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면서 반복된다.

[329.3] 주권의 필요성은 사회적 신체와 인간적 신체 사이의 전통적인 유비에 표현된 기본적인 진리이다. 토머스 홉스가 직접 디자인한 『리바이어던』의 원본 속표지에 그려진 삽화는 이 진리를 훌륭히 포착한다. 주권의 신체는 말 그대로 사회적 신체 전체이다. 이 유비는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들의 분할을 강화하고 자연스럽게 만든다. 오직 한 개의 머리만이 존재하며 여러 팔 다리와 기관들은 머리가 내린 결정과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생리학과 심리학은 이렇게 주권 이론의 명백한 진리에 힘을 보태준다. 각각의 신체에는 신체의 정념을 지배해야 하는 단일한 주체성과 이성적인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330.1] 하트와 네그리는 앞에서 다중이 하나의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일자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신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중은 주권적일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스피노자가 절대적이라고 부른 민주주의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통치형태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만인의 복수성을 주권의 단일한 형상으로 환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양체는 사회를 위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그래서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정치이론의 전통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다.

[330.2] 칼 슈미트는 정치에 있어서 주권이 갖는 중심성을 가장 분명하게 제기했던 근대 철학자이다. 슈미트는 모든 경우에 있어 주권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것이며 따라서 정치가 언젠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주권은 적극적으로는 만인지상의 권력이며 그래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일자로 정의되고, 소극적으로는 모든 사회적 규범과 규칙에서 잠재적으로 제외되어 있는 일자로 정의된다. 슈미트의 ‘총체국가’라는 신학적-정치적 개념은 근대적 주권관을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인 형태가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슈미트는 바이마르 독일에서 자유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다원론 세력과 실로 맹렬하게 싸웠다. 그는 다원론이 주권의 지배를 순진하게 부정하는 것이며 그래서 불가피하게 아나키에 이르거나 부정직하게 주권을 복수적인 권력들의 활동 뒤로 숨겨 그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331.1] 정치에 있어서의 근대 주권 이론은 경제적 관리에 대한 자본주의적 이론 및 실제와 딱 들어맞는다. 경제적 질서가 있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혁신이 있기 위해서도 생산분야에서 책임지고 결정할 수 있는 단일하고 일원적인 형상이 존재해야 한다. 예컨대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생산적 협력 속에 결합시키는 사람이다. 자본가는 근대의 리쿠르구스, 즉 공장의 사적 영역을 주권적으로 지배하지만, 항상 안정된 상태를 넘어서서 혁신하도록 압력을 받는 존재이다. 슘페터는 경제적 혁신의 주기를 가장 잘 기술하고 그것을 정치적 명령 형태에 연결시키는 경제학자이다. 주권적 예외주의에는 산업적 통치 형태인 경제적 혁신이 상응한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생산의 물질적 실천에 종사하지만, 혁신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자본가이다. 정치에서 일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경제에서도 일자만이 혁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3.3.2 주권의 양면성

[331.2] 주권 이론은 예컨대 국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주권 자체의 지형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하지만 이것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너무 협소한 시각이다. 주권은 필연적으로 양면적이다. 주권 권력은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며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지배자들과 피지배잗르 사이의, 보호와 복종 사이의, 권리와 의무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폭군이 주권을 일방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마다 피지배자들은 결국에는 언제나 반란을 일으켰고 그 관계의 양면성을 회복시켰다. 복종하는 사람들은 명령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주권 개념과 그 기능에 본질적이다.

[332.1] 주권의 양면성은 정치적 지배에서 폭력과 무력의 유용성이 제한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군사력은 정복과 단기간의 통제에 유용할 수 있지만 안정적인 지배와 주권을 성취하게 해줄 수 없다. 그것은 사실상 매우 일면적이기에 가장 약한 권력 형태이다. 주권 역시 피지배자들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주권 권력은 피지배자들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332.2] 주권 내부의 모순들-1

주권을 역동적인 양면적 관계로 인식하고 나면 주권 내부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모순들을 인식할 수 있다. 첫째로 주권의 근대적인 군사적 형상, 즉 국민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생각해보라. 핵무기에까지 도달한 근대 시기 전반에 걸친 대량파괴 기술의 부단한 발전은 주권의 이 특권을 절대적인 그 무엇에 다가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보이는 이 권력조차 삶에 대한 통제를 거부하는-예컨대 분신하는 불교 수도승의 저항에서부터 테러리즘의 자살폭파범에 이르는-행동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쳐진다. 주권에 도전하는 투쟁들 속에서 삶 자체가 부정될 때, 주권이 삶과 죽음에 행사하는 권력은 무용하게 된다. 더욱이 백성들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주권자의 권력을 침식한다. 이러한 절대적 주권의 행사는 주권 자체와 모순되게 된다.

[333.1] 주권 내부의 모순들-2

주권자는 경제적 영역에서도 피지배자들과의 관계를 협상하고 그들의 동의를 간구하도록 강제된다.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같은 초기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의 핵심에 있는 이러한 관계를 인식했다. 자본은 노동이 자본을 필요로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을 필요로 한다. 맑스는 여기에서 근본적인 모순을 인식했다. 노동은 자본에 적대적이며 파업, 사보타지, 그리고 여타 구실들을 통해 생산에 위협을 가한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자본은 자신의 적과 긴밀하게 동거하도록 강제된다. 자본은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해야 하므로 그들을 정말로 억압하거나 배제할 수 없다. 착취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적 지배관계의 핵심에 있는 모순을 요약해준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명령에 종속되어 있고 그들이 생산하는 부의 일부를 강탈당하지만 그럼에도 노동자는 무력한 희생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상 아주 강력하다. 그들이 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피억압자’는 주변적이고 무력한 대중을 지칭할 수 있지만 ‘피착취자’는 필연적으로 핵심적이고 생산적이며 강력한 주체이다.

[333.2] 주권 내부의 모순들-3

주권이 양면적이라 함은 그것이 하나의 관계일 뿐 아니라 부단한 투쟁임을 의미한다. 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도 피지배자들이 언제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한 가지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노예 상태에 놓인 자신들의 지위를 거부하고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위협이다. 주권자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이러한 행동은 억압, 노예상태, 박해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찾아 나서는 일종의 엑소더스이다. 그것은 본질적인 해방행동이자 모든 주권 형태가 부단히 관리하고, 봉쇄하고, 제거해야 하는 위협이다. 주권권력은 자율적이지 않고 하나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거부의 행동들은 사실상 실질적인 위협이다.

[334.1] 주권형태의 삶권력으로의 변화

하지만 우리 시대에 주권의 양면성이 나타내는 투쟁은 훨씬 더 극적이고 강렬하게 된다. 동의, 순종의 필요로 인해 전통적으로 주권이 부딪히게 되었던 장애물은 이제 불가피한 능동적 맞상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최초의 접근법은 우리가 삶권력(주권이 삶 자체에 행사되는 권력이 되려는 경향)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다.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의 한 가지 새로운 측면은, 그것이 지구화 과정들에 발맞추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지배형식들과 생산형식들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정치권력은 더 이상 단순히 규범들을 정당화하고 공적인 일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정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사회적 관계들의 생산을 가동시켜야 한다. 권력, 전쟁, 정치, 경제, 문화의 다양한 형태들이 제국 안에서 일종의 합주, 수렴의 형태로 모여서 결국 사회적 삶 전체를 생산하는 방식이 되고, 그리하여 삶권력의 한 형태가 된다. 다른 표현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 안에서 자본과 주권이 완전하게 중첩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5.1] 삶권력으로의 이러한 수렴을 인식하고 나면 제국적 주권이 자신이 지배하는 생산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에게 완전히 의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주권의 정치적 관계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경제적 관계와 점차 유사해진다. 자본이 끊임없이 노동의 생산성에 의존하듯이 제국적 주권 역시 동의에 의존할 뿐 아니라 피지배자들의 사회적 생산성에 의존한다. 사회적 생산자들이 권력의 관계를 거부하고 여기에서 빠져나가면 제국은 그냥 붕괴하여 생명 잃은 덩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335.2] 제국적 주권의 새로움에 대한 더 복잡한 두 번째 접근법은 제국의 무제한성을 포함한다. 이전의 주권 및 생산 형식들은 모두, 지배자들이 주권관계에 의해 세워진 장애물들을 극복하도록 해주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분할될 수 있었던, 제한된 인구에 의존해왔다. 바꿔 말하면, 특정 집단이 주권권력에 동의하거나 복종하기를 거부하면, 그 집단은 사회적 삶의 주요 회로에서 배제될 수 있었고, 극단적인 경우 몰살될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국에서는, 제국이 확장적이고 포괄적인 삶권력 체제이기 때문에, 지구의 인구 전체는 주권권력에게 생산자들로서만이 아니라 소비자들로서, 또는 네트워크의 상호작요적인 회로들 속의 참가자들로서 필수적이다. 제국은, 더욱 더 자율적으로 되는, 참으로 전지구적인 사회를 창조하고 지배한다. 제국은,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을 착취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배제할 수는 없다.

[336.1] 제국적 주권과 삶정치적 생산의 시기에 힘의 관계가 역전되어, 피지배자들이 이제 사회적 조직의 배타적 생산자들이 되는 경향이 생겼다. 이는 주권이 곧바로 무너지고 지배자들이 권력을 전부 잃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실상 지배자들이 더욱 더 기생적이 되고 점차 불필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상응하여 피지배자들은 점차 자율적으로 되고 그들 자신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경제적 자주관리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노동형태(비물질적 노동형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우리는 이 잠재력이 경제적 자주관리 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자기조직화에도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노동의 생산물들이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 소통의 네트워크들, 삶형태들이라면, 경제적 생산이 곧바로 일종의 정치적 생산, 즉 사회 자체의 생산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낡은 공갈에 속박되지 않는다. 주권과 아나티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횢거 관계들을 공통적으로 창조해낼 수 있는 다중의 힘은 주권과 아나키 사이에 위치한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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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민주주의
2장 민주주의에 대한 전지구적 요구

전지구적 개혁의 실험


289-1. 요구목록에서 구성적 제안으로
- 요구목록을 짜는 것은 때때로 덫이 될 수 있다. 소수의 제한된 변화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회와 권력구조의 훨씬 더 일반적인 변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때때로 은폐한다. 이는 우리가 구체적인 요구들을 제안하고 평가하고 이행하는 것을 거부해야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는 제도적 개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일단의 보편적 기준을 구축해야 하며, 더욱 중요하게는 그 토대 위에서 전지구적 사회의 새로운 조직화를 위한 구성적 제안들을 구축해야 한다.

289-2. 개혁과 혁명
- 여기서 개혁과 혁명 사이에는 (양자가 같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날의 조건에서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다는 뜻에서) 아무런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변형의 역사적 과정들은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개혁적 제안들조차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개혁적이냐 혁명적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구성적 과정에 돌입한다는 점이다. (온건한 개혁 제안들 속에서조차 혁명의 위험을 보며 철저한 대응을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을 보라.)

290-1. 개혁 제안들은 전지구적 민주주의를 바라는 거대한 욕망을 담고 있다
- 앞 절에서 살펴본 불만목록처럼 민주적 개혁 제안목록도 분명 불완전할 것이며, 무질서하고 잡다한 군처럼 보일 수 있다. 각각의 제안들은 전지구적 체제를 개선할 독특한 방식을 가리키지만, 그것들이 모여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제안들에 담겨 있는 요소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안에 담긴 전지구적 민주주의를 바라는 거대한 욕망을 기록하고자 한다.


# 대의의 개혁

290-2. 책무성 accountability[각주:1]
- 전지구적 체제를 민주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는 일단의 개혁 제안들에서 시작해보자. 초국적 경제기구들이 더 투명해지고 책임감 있도록(to be more transparent and accountable)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더 큰 투명성은 기껏해야 대의의 결여를 더욱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그리하여 항의하기 더 쉽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뿐이다. 더 실질적인 관념은 ‘책무성’이며, 이는 협치와 짝을 이룬다. 누구에 대해 책임을 지는가? 책무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지구적 기구들이 민중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구들, 특히 전문가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 이 논의들에서 책무성과 협치라는 용어는 정치적 영역과 경제적 영역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볼 때, 책무성은 대의의 민주적 성격을 고갈시키고, 대의를 회계와 부기의 영역에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기술적 조작으로 만든다. 이는 민주적 통제의 어떤 대의적 형태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과 안정성의 보장을 가장 분명하게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를 행정 administration으로 대체하기)  

291-1. UN 개혁안들 (1) : 안보리 권력의 변형 및 축소
- UN의 가장 비대의적인 요소인 안전보장이사회의 권력(상임이사국이 갖는 거부권)을 제거하거나 축소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A)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제거하거나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것. (B) 안보리 회원국의 바꿈으로써 권력을 교체하려는 것. (C) 안보리가 필요하다면, 모든 회원국들이 교대로 상임이사국이 되어 훨씬 더 대의적으로 만들자는 것. 

292-1. UN 개혁안들 (2) : 제2총회 또는 전지구적 의회의 창설 
- 안보리의 권력을 변형․축소하는 것은 총회의 권력을 증진시키고 그 대의적 기능을 더욱 완전하게 행사하도록 할 테지만, 총회의 대의적 성격 자체에 한계가 있다. (A) 국가들이 총회에 보낼 대표들을 임명하기 때문에 총회는 회원국들만큼만 대의적일 수 있을 뿐이다. (B) 총회에서의 대의는 인구와 관련해서 볼 때 심한 불균형(1인 1표가 아니라 1국 1표)을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중총회 같은 제2총회나 전지구적 의회를 구축하자는 제안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제안들은 ‘국민국가들이 아닌 지구의 인구 전체를 결합시키는 전지구적 기구 속에서 대의가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293-1. UN 개혁안들 (3) : 1인 1표제 민중총회/전지구적 의회? 
- 가령 40억 명의 전지구적 선거인들이 1천만 명으로 구성된 400개의 선거구로 분할될 경우 약 400명의 대표들이 총회나 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전지구적 투표체계는 민주주의적 대의에 대한 근대적 구상에 핵심적인 평등의 감각을 회복시킬 테지만 실제적으로는 관리가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전지구적 지형을 가로질러 너무 희미하게 뻗쳐있는 근대적 대의 개념은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 관념을 떠받칠 수 없다. (대표자들의 숫자에 비해 인구의 크기가 늘어남에 따라 대의의 정도는 낮아진다.) 그리고 전지구적 연방구, 즉 세계의 행정센터는 과연 어디에 둘 것인가?

294-1. 세계사회포럼(WSF)
- 1인 1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조직들이나 공동체들에 의하여 대의를 형성하는 제2총회/전지구적 의회를 제안하는 사람들은 NGO들과 사회운동들이 어떻게 하나의 전지구적 신체로 조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WSF를 지목한다. WSF는 전 세계에서 모인 NGO들의 대표들, 사회운동들, 개인들이 모여 지구화 과정들과 관련된 사회적․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정보와 견해들을 교환하는 장이며, 그 해 다른 시기에 열리는 일련의 지역포럼들에 의해 보완된다. 
- 요점은 WSF가 전지구적 통치체(global governing body)의 맹아적 형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 아니라, NGO들과 같은 일단의 전지구적인 비국가적 행위자들이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논의들을 위해 모일 수 있음을 입증함으로써 전지구적 정치기구(global political body)의 가능성 여부에 따라 가능한 노선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294-2. 민중들, 민족들, 또는 심지어 문명들에 기초한 전지구적 의회/총회나, 헌팅턴의 문명충돌모델을 대의적인 메커니즘으로 변형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95-1. 하지만 지금까지 열거한 (국민국가들이나 개인들을 기초로 하지 않는) 대의의 가능성들은 그 대의적 성격이 매우 약하다. 

295-2. 새로운 삶정치적 가능성
- 새로운 전지구적 대의기구를 창출하는 것으로 간주해온 모든 다양한 제안들에 있어서 주요한 장애물은 대의 개념 자체이다. 이 제안들은 모두 국민국가의 차원을 위해 구상된 근대적 대의 개념에 의존한다. 개별국가의 차원에서 전지구적 차원으로 이동할 때 이러한 규모상의 도약은 낡은 대의 모델을 침식하는데, 이는 규모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재의 사회적 생산의 삶정치적 성격은 낡은 대의 형태들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새로운 형태들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삶정치적 가능성이다.
    
295-3. 대의에 관한 개혁안은 대부분 미국 헌법의 구조를 복제하고 있지만, 미국이 개혁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일방주의와 예외주의. ‘미국이 미국 모델의 확장을 가로막는다.’)

296-1. 새로운 전지구적 헌법
- 근대적 국가모델이 아니라 EU의 경험에 근거한 새로운 전지구적 헌법을 위한 제안이 있다. 유럽 헌법에서의 관건은 다자적 관계에 기초한, 복수적이고 다차원적인(유럽적 차원, 일국적 차원, 하위국가적 차원, 지역적 차원 등) 의사결정 방법이다. => 복합적 연방체제
- 행정적 과정의 통일은 이 다양한 차원들의 중첩되는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방법은 다차원적 연방체제를 창출함으로써 도시, 국가, 지역 그리고 세계의 법적․정치적 형태들 간의 선형적이고 동형적인 관계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깨뜨린다. 체계의 어떠한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외부는 비본질적인 것이 되고 모든 구성적 갈등들은 내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다차원적 연방모델은 사실상, 새로운 대의형태들을 창조하지 못하고 단지 전통적인 대의 형태들을 침식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 권리와 사법의 개혁 (296-2 ~ 298-2)

- 권리와 사법의 결여에 대한 불만들은 새로운 사법기구들이 국민국가들의 통제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정의나 인권의 보편적 원칙들이 전지구적 차원에서 법제화된다면, 그것들은 강력하고 자율적인 기구들에 정초되어야만 할 것이다. 
- 전지구적 사법을 확립하자는 제안은 상설적인 국제적/전지구적 진실위원회의 창출을 필요로 한다. 체제가 자행한(systematic) 역사적 불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발전이지만, 인정과 사과로는 불의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전지구적 진실위원회가 이 부족함을 다루는 역할(처벌․보상 판결)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배상은 경제적 부패(공적 재화들을 사적 부로 환원하는, 사적 이득을 위한 공적 체계들의 불법적 일탈)와 관계가 있다. (러시아 과두 집권층, 엔론 스캔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강탈당한 공통적인 것을 환수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제도적 메커니즘들이 필요하다. 
- 하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 권리를 강화하고 불의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러한 현재의 무능력은 ‘부족함’의 문제만이 아니다. 9․11 이후 안보를 위해 자유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짝을 이루는 미국 예외주의가 권리와 사법의 제도들을 심각하게 침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의 시민적 자유를 침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리와 사법에 관한 국제적인 협정들을 거부․위반한다.) 


# 경제적 개혁 (299-1 ~ 302-2)

- 빈자의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들이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돌볼 뿐만 아니라 질병, 즉 전지구적 가난을 재생산하는 체계를 공격해야 한다. 이러한 제안들 중 가장 급진적이고 원대한 것은 최빈국들의 외채탕감일 것이다. (세계은행은 자신의 감독 하에 자신이 그 국가의 경제정책들에 부과할 조건들에 따라 감소하거나 없애자고 제안하며, 다른 이들은 새로운 독립기관을 세우자고 제안한다.) 채무 구제는 전지구적 경제에서 가장 종속적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의 순환을 깨뜨리는 데 필요하지만, 이러한 구제책들은 불평등과 가난을 계속해서 생산․재생산하는 전지구적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 전지구적 경제체계의 기본적인 기능을 개혁하자는 제안들은 (1) (신자유주의 체제와 통제되지 않는 자본에 맞서) 국민국가들에게 더 많은 관리능력을 부여하자는 전략과 (2) (생산과 유통에 통제를 행사하는 권력의 모든 형태들에 맞서) 국가들과 경제권력들 모두가 행하는 경제에 대한 통제를 약화시키자는 전략으로 나뉜다.
  (1) ATTAC의 토빈세
- 토빈세가 주는 이득은, (A) 국제 금융시장의 휘발성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주어 급속한 화폐 거래에 의한 금융위기를 완화한다는 점, 그리고 (B) 추가소득과 함께 경제 전체에 대한 더 많은 통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이런 제안들의 근본적인 목표는 부와 소득의 가장 극단적인 차이들과 왜곡들의 일부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할 가능성을 국민국가들에게 허용하는 것이다.
- 이는 주권적인 국민국가들의 시혜적 조처들에 너무 많이 의존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둔 사람들은 화폐 세금에서 얻는 소득을 국민국가들로 돌리지 말고 민주적인 전지구적 단체로 돌릴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경제적 제안을 대의체제들을 개혁하기 위한 제안들 중 하나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2) 접근권
- 파괴적인 정치적․경제적 통제 형태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제안들로, 저작권․특허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온건한 제안들로는 저작권 지속기간을 제한시키는 것, 저작권 보호를 상업적 용도에만 한정하는 것, 특허권의 경우 생산물의 종류들을 줄이는 것 등이 있고, 좀더 급진적인 제안으로는 정보공개운동이 있다. 특허권과 저작권을 통한 정치적․경제적 통제들은 혁신을 왜곡하고 경제적 발전을 제약하며, 이러한 제안들은 그 통제들을 축소시키려 한다. (저자들, 예술가들, 과학자들의 창조성을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적 메커니즘들을 발견해야하지만, 창조성이 엄청난 부의 약속에 의존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일리가 없다.) 
- 가장 혁신적이고 강력한 개혁 기획들 중 일부는 현재의 저작권 체제에 대한 대안들을 창출한다. 이 중 가장 발전된 것은 ‘창조적 공통재’ 기획이다. 
- 경제적 개혁은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만회 또는 창출에 기초해야 한다. 사유화에 관한 우리의 요구는 공적인 것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탈자유주의적이고 탈사회주의적인 정치적 기획)의 창출이어야 할 것이다. 
  

# 삶정치적 개혁 (303-1 ~ 305-1)

- 삶정치적 개혁들의 문제에 이르면 모든 어려움들이 혼합되고 확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 전지구적 전쟁상태의 개혁 : 반전활동가들의 ‘아래로부터의 외교’(인간방패)는 ‘위로부터의 외교’가 인구를 얼마나 대의하지 못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활동가-외교관들은 대표자들은 아니지만 전지구적인 영구적 전쟁체계를 끝장내고자 하는 광범위한 욕망들에 구체적인 표현을 제공해준다.
- 이외의 삶정치적 개혁 :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국제적인 협정들과 관련된다. 교토의정서나 대인지뢰금지협정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미국의 일방주의/예외주의가 장애물이 되고 있다. 
-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제안들 : 독립적인 전지구적 수자원 기관, 독립적인 전지구적 소통기관 등. (그러나 중앙집중적 권위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거대증’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 이러한 제안들에 반대하는 세력(가장 두드러지게는 미국의 거부)이 개혁을 좌절시키고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험을 용인하는 것이다. 인디미디어의 경우, 정보독점을 깨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의 생산과 분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동등한 접근과 적극적인 표현은 소통과 정보를 민주화하기 위한 모든 기획에 핵심적이다. 여기서 ‘진실’은 민주적인 소통 과정에서 다중의 표현의 차이들을 보장하는 문제로서 제시된다. 
- 삶정치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전지구적 상황을 다루는 실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삶정치적 관점을 통해 모든 운동들의 존재론적 특징을 인식하고 그것들 각각을 추동시키는 구성적 동력을 확인할 수 있다.[각주:2]   




  1. accountable : required or expected to justify actions or decisions (www.wordreference.com) [본문으로]
  2.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Samuel Beckett, Worstward Ho (198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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