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민주주의 - 3장 다중의 민주주의
당신에게 힘이 함께 하기를 May The Force Be With You
[341.1] 1부 논의 정리 : 일반적이고 항구적인 전지구적 전쟁상태
주권 관계에서 균형이 다중 쪽으로 기움에 따라, 모든 비민주적 권력은 전쟁과 폭력을 자신의 기초로서 필요로 하기에 이른다. 전쟁은 더 이상 정치권력이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 자체가 정치 체제의 토대를 규정하는 경향이 우세해진다. 폭력은 더 이상 법적 구조들 혹은 도덕적 원칙들을 기초로 해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정당화는 폭력의 효과, 즉 폭력이 가진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해서 사후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기초인 폭력이 맨 앞에 오고, 정치적/도덕적 협상이 그 결과로서 뒤따른다. 민주주의의 가능성들의 출현은 주권으로 하여금 훨씬 더 순수한 형태의 지배와 폭력을 채택하도록 강제한다.
[341.2] “탈주하라, 그러나 탈주하면서 무기를 움켜쥐어라”
순전히 대칭적인 관점에서 사고하면, 민주주의를 주권의 항구적인 전쟁에 대한 대립물, 즉 절대적으로 평화적인 힘으로 제기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 대립은 좀처럼 우리의 현실적 조건과 부합하지 않는다. 오늘날 새로이 출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힘은 단순히 무시할 수 없는, 혹은 그저 없어지기를 빌 수만은 없는 폭력의 상황에 놓여있다. 민주주의는 오늘날 주권으로부터의 이탈, 탈주, 엑소더스라는 형태를 취하지만, 엑소더스를 행하는 다중이 주권권력의 억압적 폭력에 폭력의 절대적 결여로 맞서면서 주권의 공격에 대칭적인 대립물로써 대응한다는 식의 평화주의적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엑소더스는 결코 평화주의적이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평화주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엑소더스는 능동적인 저항을, 주권의 추격하는 힘들에 맞선 후위전쟁을 필요로 한다. 들뢰즈가 말하듯이, “탈주하라, 그러나 탈주하면서 무기를 움켜쥐어라.”
[342.1] 민주주의적 폭력, 전쟁에 대한 전쟁이란 무엇인가
엑소더스와 민주주의의 출현은 그래서 전쟁에 대한 전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개념적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만약 민주주의가 주권과 대립되는 전략을 취할 수 없다면, 그리고 주권의 영구적인 전쟁에 맞서 순수한 평화주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혼란은 대립물들로 사고할 수밖에 없을 때에만 발생한다. 무력과 폭력의 민주적 활용은 주권의 전쟁과 동일하지 않고 그 대립물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다(it is different).
[342.2] 폭력의 민주적 활용 원칙 1 - 폭력의 정치에의 종속
새로운 주권형태에서는 전쟁이 일차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정치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폭력을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해야 한다(사빠띠스따의 예). 이처럼 폭력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이 그 자체로 폭력의 사용이 민주적으로 되는 데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기는 하다.
[343.1] 폭력의 민주적 활용 원칙 2 ― 방어적 폭력
폭력의 민주적 활용의 두 번째 원칙은 폭력이 오직 방어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파라오의 추격대에 맞선 유대인들의 이미지, 나치에 맞선 바르샤바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반란). 이러한 폭력의 방어적 사용 원칙은 폭정에 맞서 저항할 권리라는 오래된 공화주의적 전통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화주의적 저항권이 바로 무기소유 및 소지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미국 수정헌법 제2조의 실질적 의미다. 즉 수정헌법 제2조의 개념적 기원은 통상적으로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무기를 소유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폭정에 맞서 저항할 다중의 권리, ‘무장한 인민’의 권리에 입각해있는 것이다. 1967년 5월 2일 블랙팬서 조직원들이 흑인공동체를 방어할 헌법상의 권리를 선언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의회 건물에 총을 가지고 들어갔을 때, 그들은 이 권리의 정신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저항의 적합한 형태가 역사적으로 변화하며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따라 창안되어야 한다는 것을, 특히 총이 더 이상 방어에 적합한 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총이 아니라 다른 무기가 필요하다.
[344.1] 두 번째 원칙의 보론 - 저항으로서의 폭력
이러한 방어적 폭력의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중요한 명제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폭력은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것을 보존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약한 폭력관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이러한 의미의 폭력은, 벤야민이 이야기한 법을 정초하는 신화적 폭력이나 법을 파괴하는 신성한 폭력이 갖고 있는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민주적 폭력은 오로지 사회를 방어할 수 있을 뿐 창조하지는 못한다. 이는 혁명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적 폭력은 혁명적 과정을 열어젖히지 못하고 오히려 마지막에만, 즉 정치적/사회적 변형이 이미 시작되었을 때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적 맥락에서 폭력을 민주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저항의 행동과 그리 다르지 않다.
[344.2] 두 번째 원칙의 두 번째 보론 - 방어적 폭력을 가장한 침략과 정복
방어적 폭력의 원리가 개념적으로 명확하다 할지라도 실천에서는 종종 매우 혼동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폭력적 침략과 정복이 방어적 조치로 신비화되었던 사례들은 역사 속에 무수히 존재한다(나치의 주데텐 침공, 소련의 헝가리, 체코, 아프가니스탄 침공, 미국의 그라나다 침공, 십자군 원정). 이러한 신비화의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판본은 최근에 학자들, 언론인들, 정치가들이 부활시킨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이라는 관념이다. 폭력의 방어적 사용의 원리는 늑대에게 양의 탈을 씌우는 이 모든 신비화들을 부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345.1] 폭력의 민주적 활용 원칙 3 ― 폭력 자체의 민주적 조직화
폭력의 민주적 사용의 세 번째 원칙은 민주적 조직화 자체와 관계되어 있다. 첫 번째 원칙에 따라 폭력의 사용이 항상 정치적 과정과 결정에 종속된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정치적 과정이 다중의 수평적이고 공통적인 형성 속에서 민주적으로 조직된다면, 폭력의 사용 역시 민주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주권권력에 의해 수행된 전쟁은 언제나 자유와 민주주의의 유예를 요구해 왔다. 주권적 군대의 조직된 폭력은 엄격하면서도 의심받지 않는 권위를 요구한다. 이와는 반대로 폭력의 민주적 사용에는 목적과 수단의 분리가 있을 수 없다.
[345.2] 무기의 비판 1 ― 무력의 비대칭성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원칙들에 더해, 폭력의 어떠한 민주적 사용도 무기에 대한 비판, 즉 오늘날 어떤 무기가 효과적이고 적합한지에 대한 숙고 또한 포함해야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엄청난 비대칭성(대량살상무기, 정보와 소통 네트워크를 통한 무기의 정밀성)이 존재하는 폭력의 지형에 소총을 들고 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46.1] 무기의 비판 2 ― 테러리즘의 무용성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지배자들의 군사력과 대칭을 이루려하기보다, 현재의 다양한 폭력 형태들의 비극적인 비대칭성 자체를 깨뜨릴 수 있는 무기들이다. 테러리즘은 세계를 더 낫게 만들지 못하며 심지어 권력관계를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배자로 하여금 인권과 삶 자체의 이름으로 자신의 권력 아래로 통일될 필요성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도록 해줄 것이다. 사실 다중의 기획에 적합한 무기는 권력의 무기들과 대칭적 관계도, 비대칭적 관계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반(反)생산적이자 자멸적이다.
[346.2] 무기의 비판 3 ― 두 가지 형태의 순교
이러한 새로운 무기에 대한 성찰은 두 가지 형태의 순교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살폭파범이 그 좋은 사례인 첫 번째 형태는 순교를 불의의 행동에 (자괴파괴를 포함하는) 파괴로써 대응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두 번째 형태의 순교자는 파괴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자들의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형태의 순교는 실로 일종의 증언이다. 그것은 권력의 불의에 대한 증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증언이며, 특정한 파괴적 권력이 아니라 모든 파괴적 권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순교는 사랑의 행동이며, 미래를 목표로 하며, 현재의 주권에 반하는 구성적 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를 ‘추구’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순교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실제적인 정치적 행동과 그것에 대한 주권의 반작용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분명 다른 곳에서 정치적 행동주의를 찾을 필요가 있다.
[347.1] 무기의 비판 4 ― 새로운 무기를 창안할 필요성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무기를 창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운 무기를 발견하려는 창조적인 시도들이 많이 존재한다(퀴어네이션의 키스-인스, 지구화 시위, 불법이주).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유용하지만 분명 충분치는 않다. 우리는 파괴적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구성적인 힘의 형태인 무기들을, 민주주의를 구축할 수 있고 제국의 군대를 패배시킬 수 있는 무기들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삶권력의 패배 이후 올 삶정치적 미래에는 전쟁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를, 특이성들 사이의 협력과 소통의 강렬함이 전쟁의 가능성을 파괴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딱 일주일만 전지구적으로 삶정치적 파업을 벌여도 그 어떤 전쟁이든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다중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해줄 뿐 아니라 건설적이고 확장적이고 구성적인 무기를 창안해내는 날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군대를 지휘하는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군대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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