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1]
정체성 정치 ― 실제로는 특이성 정치 ― 의 세 가지 주요한 과제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본 지금, 우리는 특이성들 간의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인종투쟁, 계급투쟁, 젠더투쟁, 섹슈얼리티투쟁들은 서로 어느 정도로 일치하고 어느 정도로 충돌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상이한 정체성 영역들에 공통적인 과제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예속형태와 반란 및 liberation 과정 모두에서 발견되는 평행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갈등과 그것을 다룰 수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340.2]
정체성 정치는 그 자체의 개념상 일정한 분석적 · 정치적 전통 간의 평행이동translation 과정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평행론 ― 인종적 예속의 구조는 젠더적 예속, 계급적 예속 등의 구조와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들을 공유한다 ― 을 가정한다. 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매우 생산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이러한 평행이동은 같음sameness을 함의하지 않는다 ― 그것을 통해 인종적 위계, 계급적 위계, 젠더적 위계, 섹슈얼리티 위계가 기능하고 또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분석론과 전략들은 질적으로 상이하다. 평행이동은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340.3]
이처럼 공통적인 것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정체성들이 나누어져있고 서로 갈등한다는 것을 부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호교차성intersentionality 개념은 두 가지 주요한 측면에서 분할을 부각시키는 데 유용하다. 무엇보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교차한다. 다시 말해 폭력과 위계의 구조들이 흑인 레즈비언이나 아이마라 농민과 같은 특정한 주체들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각각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에 의해 내적으로 분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인종적 위계가 젠더와 계급을 분할하기도 하고, 젠더적 위계가 인종과 계급을 분할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적 다양성이 특이성이 정체성보다 개념적으로 더 적합한 한 가지 이유이다.) 둘째, 다양한 정체성들의 정치적 의제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종종 분할되고 서로 빗나가며 갈등하기까지도 한다. 예컨대 인종적 폭력을 드러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젠더적 예속에 맞선 투쟁에 반드시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반인종주의 투쟁은, 노동자 투쟁과 마찬가지로 젠더적 예속을 거의 매번 무시하거나 심지어 강화시키기도 했다. 다시 말해 상호교차적 분석이 부각시키는 사실은, 정체성들이 겪는 폭력과 예속의 상호교차적 형태들이 어떤 면에서는 평행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정치적 기획은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어떤 이들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분석의 맥락에서는, 정체성들의 인정, 긍정, emancipation을 위한 투쟁은 실제로 필연적으로 충돌할지도 모르지만, 특이성들의 liberation 운동들은 평행적인 발전 속에서 서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호교차적 분석은 그러한 이어짐과 평행론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341.1]
스피노자가 제시한 모델에 따라 평행론을 생각하면 사실 평행론은 상호교차성의 교훈들을 파악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 된다. 소위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라는 명제에 의해 정의된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속성은 서로에 대해 자율적이다 ― 정신은 신체가 행동하도록 만들 수 없고, 신체는 정신이 사유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사유의 영역과 연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발전은 동일한 질서와 연결을 따른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공통적인 실체에 참여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성의 관점에서 정체성 영역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각각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함을 의미한다. 정신이 신체가 행동하도록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이 반드시 젠더 억압을 다루게 되는 것은 아니고, 인종 투쟁이 필연적으로 호모포비아와 이성애규범성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영역에서 특이성들이 수행하는 반란, liberation, 변신의 경로는 동일한 질서와 연결을 따를 수 있다(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모델과 반대로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평행론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평행이동 과정은 이 잠재적인 일치(상응)correspondence를 드러내고 이해해야 하며, 그러한 과정은 각각의 영역의 언어가 갖는 자율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언어들 간의 소통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이어짐의 정치적 과정은 저 언어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그것들은 한데 연결해야 한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은 함께 소용돌이치는 반란과 변신을 포함하는 한 떼의 정치적 활동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 떼, 그것의 지성, 내적 조직 등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342.1]
이러한 평행론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 어떠한 영역이나 사회적 적대도 다른 영역과 적대보다 우선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정체성 정치가 고무한 다문화주의라는 요즘 유행하는 입장에 반대하면서 계급투쟁은 인종투쟁 및 젠더투쟁과 질적으로 다르다고(그것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인종-젠더-계급이라는 계열은 계급의 경우 다른 정치적 공간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린다. 반인종주의 투쟁과 반성차별주의 투쟁은 타자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위한 노력에 의해 인도되지만, 계급투쟁은 타자를 극복하고 제압하며 심지어 절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이 때 절멸이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계급투쟁은 타자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기능의 절멸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지젝의 주된 비판이 우리가 앞서 언급한 위험, 즉 정체성 투쟁이 소유로서의 정체성에 고착되어 liberation 과정에 참여하지 못할 위험을 제기하는 한에서 지젝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지젝은 계급투쟁이 반인종주의 투쟁 및 반성차별주의 투쟁과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틀렸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정체성에 갇혀서 노동자 정체성을 긍정하고 노동을 찬양하는 수많은 형태의 계급정치를 보아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젝이 혁명적 형태의 젠더정치 혹은 인종정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혁명적 계급투쟁이 인간으로서의 부르주아가 아닌 부르주아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기능”(우리는 노동자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기능도 덧붙이고 싶다)을 폐지하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페미니즘 정치와 반인종주의 정치도 성차별주의자와 인종주의자 혹은 심지어 가부장제나 백인우월주의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정체성과 인종 정체성의 토대 역시도 공격한다. 그러므로 지젝은 혁명적 계급투쟁과 혁명적이지 못한 인종/젠더 투쟁을 대비시킴으로써 잘못된 비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다양한 투쟁들은, 혁명적이지 못한 형태 ― 예컨대 노동자들의 임금요구, 성폭력으로부터의 법적 보호, 예속된 집단들을 위한 사회적 권리나 우대정책 ― 에서는(물론 이러한 형태들은 종종 매우 중요하다) 서로 크게 틀어지고 자주 충돌한다. 그러나 정체성, 소유, 주권을 폐기하고 그리하여 다양성의 장을 여는 혁명적 형태를 취할 때 투쟁들은 평행적이다.
[343.1]
스피노자 식의 평행론은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등등의 목록을 재생산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움(“등등”이 특히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을 쫓아낼 수 있게 해주는 이점 또한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는, 평행적으로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들은 무한히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것들 가운데 오직 두 가지 ―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 ― 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오직 제한된 수의 투쟁과 liberation만이 인식되고 있지만, 투쟁과 liberation의 경로는 무한히 존재한다고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수, 심지어 무한한 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통적인 기획에서 평행한 선을 따라 그것들을 절합할 것인가이다.
[343.2]
그러므로 오늘날 이러한 특이성들의 평행론이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도전들 중 하나는 혁명적 행위는 하나의 영역에 갇혀서는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고 심지어 생각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평행적 발전 없이는 어떠한 혁명적 투쟁도 좌절하거나 뒤로 나자빠지게 될 것이다. 젠더 위계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악화시키는 혁명적 인종 기획은 가로막힐 수밖에 없으며, 인종적 영역에서의 평행적 상응점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계급정치도 실패하고 말 것이다. 다양성과 평행론은 오늘날 혁명적 정치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한다. liberation의 다양한 평행적 경로들은 일치점(상응점)을 따라 나아가거나 아니면 전혀 나아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혁명적 과정은 두 다리로 걷는 것과 비슷한데, 이 때 하나의 다리가 다시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다른 하나의 다리가 발걸음을 떼야만 한다. 하나의 다리만으로 몇 걸음 깡총거리며 걸을 수는 있겠지만, 곧 넘어지고 말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맥락에서는 두 개보다 많은 다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혁명은 오직 지네처럼만,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중으로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을 위한 혁명적 투쟁은 오직 평행론과 다양성으로 구성된 삶정치적 투쟁들의 장에서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343.3]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특이성들의 혁명적 투쟁들을 평행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결코 직접적이거나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이 설명되었기를 바란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우리는 특이성들 간의 마주침과 절합의 논리, 즉 혁명을 운영하는 민주적 조직화와 결정의 논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평행적인 혁명적 투쟁들은 반란적 사건들 속에서 상호교차하는 법을 발견하고, 제도적 형태로 자신들의 혁명적 과정을 지속시키는 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혁명적 과정을 관료제적 절차 속에 고정시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구성적 마주침들이 반복할 수 있도록 하고 변형의 과정을 영속적으로 만들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정치적 몸들을 창조함을 의미한다.
[344.1]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비록 오늘날 학자들이 혁명을 근대성과 동일시하고, 애도나 환호를 표하면서 오늘날 혁명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한다. 2부에서 논의했던 바와 같이 위계, 식민성 그리고 소유에 의해 규정되는 근대성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에, 근대적 혁명은 종국적으로 불가능하다. 근대적 규율과 통제에 저항하는 반근대적 투쟁들조차도 저항을 넘어 세계를 새로이 창조하는 liberation의 과정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근대성과 반근대성 간의 투쟁들에서 나타났던 (너무나 많은!) 혁명적 꿈과 기획들은 결국 근대성 너머를 가리켰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과 특이성들의 다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출현하고 있는 대안근대성만이 혁명에 적합한 유일한 지형이다. 가장 도식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근대성을 규정하는 정체성-소유-주권의 3항은 대안근대성에서 특이성-공통적인 것-혁명에 의해 대체된다. 이제, 마침내 혁명은 시대의 요청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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