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332.1 앞의 두 가지 과제를 지지하고 정체성의 반란적 기능을 계속해서 전진시키고, 정체성의 정치를 혁명적 기획을 향해 밀어붙이려면 세 번째 정치적 과제, 즉 정체성 정치 그 자체의 지양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체성의 자기 지양은 어떻게 혁명의 정치학이 정체성으로 시작하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러한 역설적 과정은 변증법적 부정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곧 보게 될 바와 같이 자기 변형과 변이의 엄밀하게 긍정적인 운동이다. 나아가 이는 페미니즘, 인종 정치, 계급 정치 를 비롯한 여타 정체성 정치의 혁명적 흐름과 그 외의 모든 비혁명적 판본을 구별짓는 기준이다.
332.2 혁명적 꼬뮤니즘 전통은 이러한 역설적 제안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사례를 제공한다. 이 전통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으로서 자기 자신의 폐지를 결심하는 한에서 인류 역사의 진정 혁명적인 첫 번째 계급이다. 귀족정과 모든 선행하는 지배 계급이 그러했듯이 부르주아는 계속해서 그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 마리오 트론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 노동 계급은 자신이 자본인 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노동에 대항하는 노동자 투쟁, 노동자에 대항하는 노동자 그 자신의 투쟁”―바꿔 말하면 그 자신의 정체성의 지양을 겨냥하는 정체성 정치. 이 꼬뮤니즘적 제안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파괴가 아니라 신을 노동자로 규정하는 정체성의 파괴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계급 투쟁의 첫 번째 목표는 자본가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특권과 권위를 지탱하는 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허물어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를 종속시키는 조건들을 폐지하는 것이다. 노동 거부는 이러한 기획의 중심적 슬로건이다. 노동거부와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지양은 생산 및 혁신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창조적 힘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고 용이하게 하는, 아직 상상되지 않은 생산 관계들의 발명을 의미한다. 노동자 정체성을 넘어서는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로서의 종속을 결정하는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구조적 ․ 제도적 형태를 가시화하고 이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면서, 앞의 두 과제를 함축하고 또 이를 더 밀어붙인다. 여기에 노동자 정체성의 인정이나 긍정, 재산으로서의 정체성의 소유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정체성의 지양을 겨냥하는 무기로서 정체성의 소유가 아니라면 말이다. 정체성 지양 기획은 따라서 사적 소유와 국가의 지양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충족한다. 혁명적 코뮤니즘이 해방이 아닌 자유화의 기획이려면 그것은 노동자 정체성을 넘어서는 자기 변형의 과정을 작동시켜야 한다.
333.1 이러한 정식화는 혁명적 계급정치와 혁명적이지 않은 계급 정치 형태의 구별을 명백하게 한다. 혁명적 정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 내에서 노동자 조건의 개선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더 나은 노동 조건, 더 많은 임금, 강화된 사회 서비스, 통치에 있어서 훨씬 더 많은 대의를 비롯한 개혁을 획득함으로써 노동자는 인정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해방을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오직 노동자 정체성을 보존함으로써만 그러하다. 혁명적 계급 정치는 주체성 생산과 사회적 제도적 혁신 과정을 가동시키면서 노동자를 종속시키는 구조와 제도들을 파괴하고 따라서 노동자 정체성 그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 혁명적 계급정치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권력을 차지하여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 이전의 사회적 계급을 대신해 권좌를 차지하는 오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또한 혁명적 계급정치는 모든 사람을 부르주아 혹은 프롤레타리아로 만들면서 현존하는 계급 정체성 중 하나를 보편화함으로써 사회적 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삼지도 않는다. 이 모든 비혁명적 기획들은 노동자 정체성을 고스란히 남겨두지만, 혁명적 과정은 이를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가 없는 사회는 어떠할 것이며, 대체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공통적 부의 자율적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의 5부와 이 책 전체에 걸쳐 탐구하고자 했던 바이다.
334.1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 지양이 앞서 언급한 정체성 정치의 두 가지 과제의 기반을 침식하고 혼돈과 사회적 무차별성의 심연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근심을 부디 보류하라. 곧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다른 정체성 영역에 확장하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정체성의 자기 지양이 어떻게 혁명적인 것을 규정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34.2 혁명적 페미니즘은 그것이 젠더의 지양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 의해서 여타의 페미니즘 지평들과 구별된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폭로하며, 가부장제적 사회제도에 대항해 반란을일으키고, 여성의 평등과 해방을 요구하는 것에 더해서 혁명적 페미니즘은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의 폐지를 추구한다. 웬디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우리가 새로운 여성 및 남성이 될 수 있다고, 젠더를 생산하는 조건을 말그대로 조절하여 젠더를 다르게 생산할 수 있다고, 법과 다른 제도들에서 젠더적 편견을 축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젠더를 넘어서 생산될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보다 앞서 가일 루빈Guyle Rubin은 “젠더를 만들어내는 사회 시스템의 폐지”를 목표로 분명히 표현한 바 있다. 린다 제릴리의 작업과 같은, 오늘날 “자유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조류는 혁명적 페미니즘에 대한 이러한 사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유에 대한 추구가 해방이 아닌 자유화의 과정으로, 젠더 정체성을 보존하거나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양하고 젠저 관계를 변형시키는 과정으로 생각되는 한에서 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혁명적 제안을 “젠더없는 괴물스러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꿈”이라 부른다. 혁명적 기획은 해방의 개혁주의적 전망(젠더적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젠더적 위계가 없는 세계)을 넘어서 정체성 자체의 폐지를 지향한다. 차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 실은 특이성들의 확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젠더로 인지하는 바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따라서 라블레적인 의미에서 괴물적이다. 그것은 창조와 발명의 힘으로 넘쳐흐른다.
335.1 이러한 지평에서 볼 때 퀴어 정치는, 퀴어 정치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인 마이클 워너, 주디스 버틀러, 이브 세지위크 같은 이들의 작업 속에서 퀴어 정치학이 정체성 정치를 정체성 비판과 불가분하게 연결지은 이래로, 정체성 정치의 가장 명백하게 혁명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퀴어 정치는 다른 젠더적 위계와 함께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 혐오의 폭력성과 종속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으로서의 여성, 남성 및 여타의 젠더 정체성과 함께 “동성애자” 또한 지양하고자 한다. 안나마리 Jagos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퀴어는 그 자신의 공고화나 심지어 안정화에 조차도 아무런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정체성 범주이다.... 퀴어는 정체성이라기보다 정체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저자들과 오늘날 공적 담론 속에서 점점 더 “퀴어”는 정체성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정체성 범주로, 종종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의 줄임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정체성 영역에서 비혁명적 조류와 혁명적 조류 사이의 개념적(이고 정치적인) 분열을 확인하였듯이, 퀴어 이론과 퀴어 정치학의 영역 또한 퀴어를 정체성으로 긍정하는 옹호 기획과 퀴어를 모든 젠더 정체성을 침식하고 폐지하며 일련의 되기를 작동시키는 반 정체성으로 이용하는 제안들로 쪼개어져 있다.
335.2 흑인 급진주의 또한 다른 정체성 부문에서와 유사한 혁명적 계획에 입각한 강력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항한 반란을 흑인임을 지양하는 과정으로 보완한다. 파농은 초창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유색인의 그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화 없는 자유화는 무의미하다.” 그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화는 정체성의 자기 지양이다—이는 인종적 위계의 파괴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바의 인종의 폐지를, 따라서 파농의 관점에 따르면,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를 표시한다. 이러한 점에서 말콤 엑스와 휴이 뉴튼이, 정체성에 대한 민족주의적 긍정과 혁명적 기획 사이의 갈등을 깨달았을 때, 자신들이 이전에 옹호했던 흑인 민족주의적 입장을 문제시하고 거기에서부터 한 발 물러섰다는 것은 흥미롭다. 특히 뉴튼은 인종적 정체성과 그것의 종속의 구조의 폐지를 함축하는 자유화를 위한 정치적 틀을 나타내려는 노력속에서, 민족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마침내는 “간-공동체주의”로 혁명의 틀을 점차 바꿨다. 인종은 사유의 대상으로서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위계, 분리, 지배의 사회적 구조와 제도로서 파괴되어야 한다. 정체성의 폐지는 다시 한번, 소유와 주권의 폐지를 함축한다. 종속의 정체성으로서의 흑인임 뿐 아니라 백인 및 다른 모든 인종적 정체성과 함께 흑인임 자체를 폐지하는 자유화의 기획만이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336.1 정체성 정치에서 출현한 이러한 유사한 혁명적 제안들은 두 가지 중요한 비판에 맞닥뜨린다. 첫 번째 비판은, 정체성을 폐지하자는 제안이 사회적 억압을 폭로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정체성 정치의 능력을 침식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세 번째 임무가 앞선 두 가지 과제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평에서 볼 때, 정체성을 폐지하려는 노력은 정체성과 그 위계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지배적이고 반동적인 전략에 힘을 불어넣어줄 뿐이다. 이러한 비판은 세 가지 과제들이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앞의 두 과제 없이 세 번째 과제를 추구하는 것은 순진하고 현존하는 위계에 저항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과제 없이는, 앞의 두 가지 과제는 정체성 공식에 얽매여 자유화의 과정을 작동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설명의 명료함을 위해 세 가지 과제를 차례로 제시하긴 했지만 세 가지 과제들은, 예컨대 혁명적 계기를 어떤 막연한 미래로 유예함이 없이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337.1 다양한 정체성 부문에서 혁명적 제안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차이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그것은 정체성의 지양이 차이 그 자체의 파괴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정체성의 지양이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만드는, 차이 자체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대로 정체성의 지양은 차이—사회적 위계의 자국이 남지 않은 차이—의 방면과 확산을 일으킨다. 두 개의 젠더 정체성과 함께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지양되면 다양한 성적 차이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올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했듯이, 두 개의 성 혹은 0개의 성이 아니라 n개의 성들이. 폴 길로이 또한 이와 유사하게 차이의 확산으로 특징지어지는 비인종적 사회를 생각하기 위해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가 설명하길, 디아스포라의 조건과 지평은 고정불변의 기원이나 순수하고 확고한 정체성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함축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혼합과 운동이 가능하게 하는 풍요로움과 사회적 창조성을 조명한다. 그래서 길로이는 “공생공락conviviality”, 즉 사회적 차이들이 함께 거주하고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사회를 그린다. 그는 영국 메트로폴리스의 다문화적 사회적 삶 속에서 이러한 상황이 출현하고 있음을 본다. 혁명적 기획은 확산하는 차이들 사이에 공생공락을 창조해야만 한다.
338.1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체성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분석하고 있는 과정에 대한 더 적합한 개념은 특이성이기 때문이다. 특이성은 유럽적 사유 속에서 둔스 스코투스에서 스피노자, 니체와 들뢰즈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정체성에 대하여, 특이성은 세 가지 주요한 특징으로 규정된다. 이 세 가지 특징들은 내재적으로 특이성을 다양성과 연결시킨다. 우선 모든 특이성은 그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가리키며 또 그에 의해 규정된다. 어떤 특이성도 홀로 존재하거나 사유될 수 없다. 특이성의 존재와 규정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특이성들과 맺는 관계로부터 유래한다. 둘째, 모든 특이성은 자신 안의 다양성을 가리킨다. 각각의 특이성을 무수히 잘라도 그것은 특이성의 규정을 침식하지 않고 구성한다. 셋째, 특이성은 항상 다르게 되기의 과정, 즉 시간의 다양성에 관여한다. 이 특징은 앞의 두 가지 특징으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사회적 다양성을 이루는 다른 특이성들과의 관계와 각각의 특이성 안의 다양성의 내적 구성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339.1 정체성으로 특이성으로 지평을 바꾸면 과정의 혁명적 계기가 명료해진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이러한 과정은 자기 지양이라는 부정적, 역설적 관점으로 이해되는 반면, 특이성의 관점에서 과정은 변형의 계기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는, 혁명적 과정이 차이의 확산을 낳는 이유가 미스테리가 아니다. 다르게 되는 것이 특이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특이성 개념은 따라서 정체성 담론을 너무 자주 오염시켜 온 모든 변증법적 환상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이점 또한 가지고 있다. 특이성은 다양성들의 장으로서 공통적인 것을 지시하고 따라서 소유의 논리를 부순다. 소유에게 있어서 정체성과 같은 것이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는 특이성이다. 따라서 정체성과 특이성의 구별은 우리가 앞서 인용한 자유 획득에 대한 두 가지 관념 사이의 구별에 상응한다. 즉 정체성은 해방될 수 있지만, 오직 특이성만이 스스로를 자유화할 수 있다.
339.2 정체성을 지양하는 이러한 혁명적 과정은 괴물스럽고, 폭력적이고, 치명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아를 구하려 하지 말라–너의 자아는 희생되어야 한다! 이는 자유화가 우리를 아무런 동일시의 대상도 없는 무차별적 바다에 던져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정체성이 더 이상 닻으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 젠더, 혹은 다른 정체성 형태들이 없는 세계의 미지의 바다에 몸을 던지기보다, 벼랑 끝에서 물러나 자신의 지금 모습에 머무르려 애쓸 것이다. 지양은 또한 우리가 앞서 말한 공통적인 것의 부패한 제도들 모두를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종종 지배권력에 맞선 폭력적 전투를 수반할 뿐 아니라, 이러한 제도들이 부분적으로 우리의 지금 모습을 규정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보다 분명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할 것이다. 혁명은 소심한 겁쟁이의 과업이 아니다. 혁명은 괴물들의 것이다. 너는 네가 될 수 있는 바를 찾기 위해 지금의 너를 잃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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