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1]
여기서 “혁명은 폭력적이어야 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흔히들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혁명이 반드시 유혈사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력force의 사용은 요구한다. 그러므로 더 나은 질문은, 폭력이 필요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폭력인가이다. 그리고 반란과 제도 간의 연결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이 질문은 두 가지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 하나는 지배권력에 맞선 투쟁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 만들기the making of the multitude의 측면이다.
[367.2]
첫번째 측면에서 무력은, 자유를 얻기 위해 요구된다. 지배권력이 그것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유대인 노예들은 모세와 함께 평화롭게 이집트를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그들이 싸우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지배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때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Liberation은 지배권력에 맞선 방어적 투쟁을, 그러므로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진영들 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전투인 내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쟁조차도 치명적인 무기와 유혈사태를 늘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람시는 우리가 앞서 언급한 “기동전”(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습격이나 쿠바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 공격과 같은 무장반란이 그 전형이다)과 “진지전”(이는 일반적으로 문화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오랜 기간에 걸친 비무장 투쟁을 수반한다)의 구별과 함께 특정한 상황에 적합한 상이한 유형의 무력과 무기를 구분했다. 그람시는 원칙적으로 무장투쟁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점은 병기arms가 언제나 최선의 무기weapons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엇이 지배권력에 맞선 최선의 무기이냐 ― 총, 평화적 가두시위, 탈주, 언론캠페인, 노동파업, 젠더규범을 위반하기, 침묵, 풍자 등등 ― 하는 것은 상황에 달려있다.
[368.1]
우리는 “그것은 상황에 달려있다”라는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각의 상황에서 최선의 무기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최초의, 그리고 가장 분명한 기준은, 어떤 무기와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센 화력을 보유한 쪽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에는 점점 더 무장부대보다는 “비무장 다중”이 효과적이고, 정면공격보다는 탈주가 더욱 강력하다. 이 맥락에서 탈주는 종종 사보타지, 협력의 철회, 대항문화적 실천, 일반화된 불복종 등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한 실천들은 효과적인데, 그 이유는 삶권력은 언제나 자신이 지배하는 주체성들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성들이 어떤 지형을 비우면 진공이 창출되는데, 삶권력은 그 진공을 견디지 못한다. 새로운 천년의 전환기에 활발하게 펼쳐졌던 대항지구화 운동들은 대체로 이러한 방식 ― 통제의 연속성에 균열을 내고, 그 결과 발생한 진공을 새로운 문화적 표현과 삶의 형태들로 채우기 ― 으로 기능했다. 그러한 운동들은 새로운 반란들이 취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불복종 전략, 새로운 민주주의의 언어, (평화, 환경 등을 위한) 윤리적 실천의 무기고를 남겨주었다.
[368.2]
첫번째 기준보다 두번째 기준, 즉 어떤 무기와 어떤 형태의 폭력이 다중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가 한층 더 중요하다. 전쟁의 수행은 언제나 주체성의 생산을 수반하는데, 종종 적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투쟁을 수행하는 이들 자신에게 가장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793년에 프랑스혁명의 폭력을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옹호했을 때, 토머스 제퍼슨은 바로 이 두번째 기준을 잊었던 것 같다. 그는 윌리엄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전체의 자유가 그 사건에 달려있었다. 순수한 피를 그토록 적게 흘리고도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던가? 이 대의를 위해 사라져간 순교자들은 내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혁명이 실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계의 절반이 황폐해지는 것을 보는 편을 원했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 오직 아담과 이브만 남는다해도, 자유롭게 남을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그게 더 나을 것이다.” 분명 우리는 제퍼슨이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수용하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리고 확실히 제퍼슨 자신도 주어진 상황에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혁명적 행위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강화하고 다중 만들기 과정을 촉진해야 할 필요를 등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유와 죽음”이라는 생각에 공감하지도 않는다.) 대규모 유혈사태라는 이슈는 차치하고,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퍼슨이 아담과 이브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인류를 어떤 상상된 원초적 조건, 자연적 조건, 출발점으로 되돌려서 벌거벗은 삶bare life이라는 관념에 만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제퍼슨은 우리와 비슷한 관점에서 아담과 이브가 혁명적 과정으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인류[인간성]의 창조를 표지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하튼 혁명적 투쟁에서 무기와 폭력의 형태를 평가함에 있어서, 적에 대한 효과의 문제는 언제나 다중과 다중의 제도 건설 과정에 대한 영향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369.1]
이는 혁명이 무력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두번째 측면으로 바로 우리를 이끈다. 두번째는 다중을 만들고, 다중 내의 갈등과 싸워서 그것을 해소하고,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을 한층 더 이로운 관계로 이끌 뿐만 아니라, liberation에 필요한 여러 변형들 앞에 놓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장이다. 제도의 무력[힘]이 어느 정도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생쥐스트는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1973년에 쓴 글에서 제도의 혁명적 기능을 주장한다. “테러가 우리에게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제거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부패로부터 구해줄 것인가? ... 제도가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현존하는 지배권력과 그것의 사회적 위계에 맞선 전투에 있어서 (테러는 말할 것도 없고) 무장투쟁이 갖는 유효성과 바람직함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으며, 생쥐스트의 위 발언의 첫 번째 부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의문시될 수 있다. 좀 더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부패에 맞선 제도의 무력[힘]을 긍정하는 두번째 부분이다. 물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생쥐스트가 부패를 혁명 지도자들이 수립한 노선으로부터의 이탈로, 제도를 순종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똑같이 부패에 맞선 제도라는 슬로건을 주장하고 싶다. 물론 매우 다른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말이다.
[370.1]
우리는 이 책의 여러 지점에서 공통적인 것의 부패를 분석했다. 그러한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하나는 사회적 위계의 부과를 통한(예컨대 사유화를 통한) 공통적인 것의 파괴라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의 힘을 감소시키고 주체성의 생산을 가로막으며 다중 내부의 갈등을 악화시키는 제도들 내에서 공통적인 것의 부정적 형태가 영속화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활동에는, 가족, 기업, 민족과 같은 공통적인 것의 부패한 형태들의 제도를 파괴하는 일이 하나의 부분으로서 포함된다. 그러한 제도들에 대한 투쟁은 다양한 전선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그 중 많은 부분은 우리가 여태껏 상상해보지도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 전투는 피한방울 없이도 충분히 폭력적이고 거칠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 예컨대, 재생산 권리, 섹슈얼리티, 혈연구조, 성별 노동분업, 가부장적 권위 등의 측면에서 가족이라는 부패한 제도를 보잘 것 없는 방식으로라도 위혐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처벌이 가해지는지를 생각해보라. 공통적인 것을 부패시키는 제도들은 강렬하고 광범위한 싸움 없이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쥐스트는 투쟁이 부패한 제도들의 파괴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축도 수반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제도들은 부패와 싸워야 한다. 새로운 제도들은, 사회를 통일시키고 사회적 규범에의 순응성을 창조함으로써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이로운 형태들의 생산을 활성화하고,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개방적이고 평등한 상태로 유지하며,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의 기쁜 마주침을 촉진함으로써 ―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러한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들과 싸움으로써 ― 부패와 싸워야 한다. 이는 사랑의 훈련은 악과 싸울 수단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우리의 앞선 제안을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다시 진술한 것일 뿐이다.
[371.1]
혁명가들이 만나게 되는 가장 무시무시한 폭력은 혁명적인 정체성 정치에서 발견되는 괴물스러운 자기변형일 것이다. 정체성을 폐지하는 것, 현재의 자신을 떠나는 것 그리고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를 비롯한 어떠한 정체성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은 엄청나게 폭력적인 과정이다. 이는 지배권력이 그러한 길의 매걸음걸음마다 싸움을 걸어올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의 핵심적인 자아정체성 중 일부를 포기하고 괴물이 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쥐스트와 피로 얼룩진 그의 동료들조차도 그러한 테러[공포]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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