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6.3. 혁명을 다스리기(Governing the Revolution)

 

혁명적인 법은 그 목적이 혁명을 지속하며 그 과정을 가속화하거나 조절하는 데 있는 법이다.

꽁도르세, 혁명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On the Meaning of the Word Revolutionary

 

 

6.3.1. 이행의 문제

 

[361: 1] 너무나 많은 혁명적 사유가 수행해야하는 희곡의 모든 막을 등한시하고 전주곡에만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행의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않는다. 지배 권력의 타파, 구체제의 파괴, 국가 장치의 분쇄―자본,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의 전복일지라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사람들이 다중의 형성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어떻게든 현대 사회의 위계화와 부패를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다수다양성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서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는다면―요컨대 민주주의 사회가 이미 완비되었다면―그것으로 아마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래,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권력 구조를 파괴하는 반란의 사건으로 충분할 것이며, 압제의 멍에 아래에 이미 존재하는 완성된 인간사회는 자발적으로 번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인간 본성은 완성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모두 정체성들, 위계화들, 그리고 부패들과 같은 현재의 권력 형태들 속에 얽혀있고, 연루되어 있다. 혁명은,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이, emancipation뿐만 아니라 liberation을 요구한다. 즉 파괴라는 사건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길고 지속적인 변형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이행에 관한 문제이다. 즉 어떻게, 반란적인 사건을 확장시켜서 해방과 변형의 과정으로 만들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362: 2] 다음과 같이 꽁도르세 선언하고, 한나 아렌트는 약 2백년 이후에 그를 되풀이 한다. “‘혁명적이라는’ 단어는 자유를 목표로 하는 혁명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혁명들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해야 하고, 그리하여 혁명적 이행의 방향과 내용은 다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능력의 증가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사람들people은 본래부터 공통적인 것을 함께 관리하고, 서로 협동하는 능력을 자연발생적으로 갖추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두 보이스(W. E. B. Du Bois)는 미국 시민전쟁 이후 재건시대의 약속들, 배신들, 그리고 실패들을 연구하면서, emancipation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았다. 미국 정부와 몰수당한 남부 노예소유자의 모든 함정과 속임수에 더하여, 그리고 남부로 이주한 북부의 자본가들에 의해 창출된 인종적, 계급적 위계들에 더하여, 두 보이스는 또한 노예제도 폐지 이후에도 막대한 대다수의 인구는, 즉 백인과 흑인을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능력들이 부족하여, 여전히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Emancipation은 시작일 뿐이다.

 

[362: 3] 근대 혁명적 사유의 연대기에서, 레닌은 혁명적인 이행에 관해서는 가장 표준적인 전거를 제공한다. 우리가 앞에서 서술했듯이, 레닌은 지금과 같은 인간 본성은 민주주의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들의 습관, 판에 박힌 일, 심성, 그리고 일상의 무수한 모세혈관적인 실행 속에서, 사람들은 위계, 정체성, 인종차별, 그리고 공통적인 것의 일반적인 부패한 형식들에 매몰되어 있다. 그들은 아직 주인, 지도자, 그리고 대표자들 없이는 민주주의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레닌은 두 부정으로 이루어진 변증법적 이행을 제안한다. 먼저, 독재 기간에는 사회를 지휘하고 주민을 변형시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부정해야 한다.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일단 창조되기만 하면, 독재는 부정될 것이며 새로운 민주주의는 성취될 것이다. 레닌은 명쾌하게 문제를 설정한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변증법적 해결책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마땅히 의심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행적 독재”가 민주주의로의 변증법적 전도에 저항하면서 권력에 매우 집요하게 집착했기 때문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독재의 사회적 구조는 다중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민주주의의 훈련training을 촉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독재는 종속을 가르친다. 민주주의는 행위함으로써만 학습될 수 있다.

 

[363: 2] 이행의 문제에는, 민주주의적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로 인도하는 긍정적이고 비변증법적 해결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앞 절에서 우리의 분석은 이미 민주주의적 이행을 위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를 계발하였다. 우리가 설명한 반란적인 사건은, 민주주의적 결정을 형성할 수 있는 다중의 능력을 계발하는 제도적 변형 과정 속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중의 형성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적 조직화의 기획이다. 이 이행이라는 관념은, 마지막 순간에 스펙트럼의 맞은편 끝으로 그 과정을 밀어붙이는 변증법의 부메랑 효과에 의지하기보다는, 점근선적 접근으로 그려진다. 그 점근선적 접근에서는, 운동이 결코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이행과 목표 사이의, 수단과 목적 사이의 거리는 그것이 중요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극소해질 진다. 이 과정은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하고 혁명을 불확정적인 미래로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낡은 개혁주의적 환영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기는커녕, 현재 사회 그리고 지배권력과의 단절은 발본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반란이 이행의 과정에서 일소되는 만큼, 이행은 끊임없이 반란의 힘을 갱신해야 한다. 달리 말해, 현재 사회의 국가를 평가하는 가운데, 핵심은 유리컵에 절반이 비었는가, 남았는가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리잔을 박살내는 것이다!

 

[363: 3] 그러나 우리가 말했듯이, 이행 과정은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이행은 어떻게 통치govern될 수 있을까? 무엇이 혹은 누가 이행을 인도하는 정치적 사선(斜線)을 그어낼 수 있을까? 어쨌든 정치적 선은 항상 일직선이지도 않고 당장 명확하지 않으며, 모호한 곡선을 통해 사선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들은 우리를 전위, 지도, 그리고 대표와 같은 딜레마로 되돌아가게 한다. 혁명적인 운동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중들을 대표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이나 지도 그룹―당, 혁명정부, 평의회, 이사회 등등―에 의한 지배와 조종 과정을 허용해 왔다. 그리고 혁명적인 투쟁 속에서, (노동 과정에서 상위의 지식, 의식이나 지위를 지닌) 하나의 사회적 그룹에 다른 사람들을 제어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앞서 말한 잠재적인 평행주의 깨트리는, 지도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여러 차례 들어왔는가? 산업노동자들은 소작농을 지도해야 한다고, 백인노동자들은 흑인노동자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종종 지도의 체제화는,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에 관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주장에 의해 수행되었다.

 

[364: 2] 우리의 논의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편 이행의 과정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정치적 사선에 따라 유도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 그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어떤 사회적 정체성이나 전위 그룹이나 지도자를 인정하는 것은 이행이 제공해야 하는 민주주의적 기능을 침식시킨다. 한 측면에서는 무력함과 무질서의 위험과, 다른 측면에서는 위계화와 권위의 위험 그 사이를 걸어 갈 수 있는, 혁명적인 과정을 위한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364: 3]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는 방법은 정치적 사선삶정치적 다이아그램으로 되돌리는 것, 즉 그것을 사람들이 이미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고 특히 삶정치적 생산 과정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능력들에 관한 조사에 근거 짓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제안한 어법으로 말하면, 이것은 다중의 잠재적인 정치적 구성을 발견하기 위해 생산적 다중의 기술적 구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3장와 5장에서 행해진 경제적 분석들에 관한 정치적 결말을 얻는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삶정치적 맥락에서 커뮤니케이션과 협력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한, 생각, 이미지, 코드, 언어, 지식, 정동, 등등의 생산은, 자율적인 공통적인 것의 생산으로, 다시 말해 삶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삶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은 바로 정치적 행위에 관한 정의이다. 이것은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행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로, 삶정치 생산의 자율성은, 여전히 자본의 명령 하에서 지시받고 강요받고 있어서, 부분적으로 자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경제적 능력들은 바로 정치적 능력들로 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의 공통적 짜임 속에―이행의 정치적 사선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다중의 능력처럼―잠복적, 잠재적 유충으로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행위와 조직을 수단으로 한 이러한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교차하는 반란적인 사건을 통해서 평행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투쟁들을 공통적인 것의 관리라는 제도적 과정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365: 2] 안토니오 그람시의 “수동 혁명”이라는 관념과 그 한계는 우리에게, 정치적 사선과 삶정치적 다이아그램 간의 관계가 이행의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루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람시가 많은 핵심 개념들을 가지고 작업할 때처럼, 그는 다각적 관점을 통해 개념에 좀 더 넓은 진폭을 부여하면서 “수동 혁명”을 다양한 맥락에서 약간씩 다르게 사용한다. 그의 첫 번째, 그리고 주요한 용법은 19세기 이탈리아 부르주아 사회의 수동적 변형을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능동적 혁명적인 과정과 대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람시는 수동 혁명은 혁명없는 혁명, 즉 주체성 생산을 위한 강력한 과정이 중심적으로 드럼남이 없는 정치적 구조와 제도적 구조의 변형이다. 사회적 행위자들보다 오히려 “사실”이 실질적 주인공이다. 둘째로, 그람시는 또한 “수동 혁명”이라는 용어를, 1920, 30년대의 미국 공장 시스템의 발달 속에서 주요하게 인지한 자본주의적 경제 생산 구조의 변화에 사용한다. “아메리카니즘”과 “포드주의”는 맑스가 자본 내의 노동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이라고 부른 것의, 즉 정확히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자본의 구조적 변형이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고, 강력한 주체에 의해 가동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수동 혁명”을 역사 분석의 서술적 도구로서 사용한 이후에, 자본주의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변화 모두를 고려하면서, 그람시는 세 번째로, 그것을 투쟁을 위한 경로를 시사하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우리는 자본 안에 종속된 사회에서 혁명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람시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대답, 즉 시민사회의 제도를 통한 긴 행진이다.

 

[366: 2] 그람시의 다양한 정치적 제안들은 레닌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자의 비판으로서 합체한다. 그는 “기동전”이 아니라 “진지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달리 말해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인 타격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로부터 헤게모니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 속에서, 문화와 정치적 영역에서의 확장된 일련의 전투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레닌주의에 비판적이다. 19세기 이탈리아 부르주아지나 20세기 프롤레타리아에 있어서 수동 혁명은, 능동적인 혁명보다 우수한 것이 아니라, 최선이 불가능할 때, 그리고 혁명적인 과정을 이끌 능동적인 주체가 없을 때, 단지 대안일 뿐이다. 진지전, 헤게모니 그리고 수동 혁명을 포함하는―그람시의 정치학의 모든 핵심적 사유는 비혁명적 시기동안, 혁명적인 활력의 창안을 목표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언젠가 이것이 가능하게 될 때, 이것은 능동적 혁명의 지평으로 향하게 된다.

 

[366: 3] 따라서 그람시는 여러 면에서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의 예언자이다. 그는 적어도 산업노동자들의 소작농에 대한 “지도”에 관해서는, 산업노동자들의 전위가 더 이상 능동적 프롤레타아적 혁명의 주체로서 임무를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노동자 전위가 바람직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그람시는 포드주의에서 자본 아래로의 사회의 포섭이 프롤레타리아의 기술적 구성의 변형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리고 그는 결국, 삶정치적 다이아그램 속에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사이의 분할을 깨뜨리며, 그리고 문화적이고 사회적 관계들을 직접적으로 경제적 가치와 생산의 영역으로 가져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공장벽을 넘어서 사회전체 영역을 포위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새로운 기술적 구성이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을 함의한다는 점을 파악하기도 한다. 즉 “미국에서 [산업]합리화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생산 과정에 적합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공들여 만들 필요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람시는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의 개발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적 사선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혁명적인 제도에서 다중의 형성 그리고 다중의 민주적 의사결정능력이 혁명적 제도들로 구성되고 공고화되는 것이, 정확히 그람시가 수동 혁명보다는 오히려 능동 혁명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는 주체성의 생산과 같은 종류이다. 삶정치적 지형에서 레닌주의 그람시로의 그러한 회귀는 우리가 그람시의 사유의 겉보기에 분기하는 가닥들을 모으는 것을 허용한다. 우리는 양자택일―반란인가 제도적 투쟁인가, 수동 혁명인가 능동 혁명인가―에 직면해 있지 않다. 대신에 혁명은 동시에 반란과 제도, [하부]구조적 변형과 상부구조적 변형이기도 하다. 이것이 다중의 “군주되기”의 길이다.

 


'<Commonweal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6.3.1. 이행의 문제  (0) 2010/09/06
6.3.2 혁명적 폭력  (0) 2010/09/04
6.2.3. 반란과 제도  (0) 2010/08/30
6.2.2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0) 2010/08/28
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0) 2010/08/21
6.1.3 혁명적 아쌍블라주들  (0) 2010/08/21


[367.1]

여기서 “혁명은 폭력적이어야 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언제나 흔히들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혁명이 반드시 유혈사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력force의 사용은 요구한다. 그러므로 더 나은 질문은, 폭력이 필요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폭력인가이다. 그리고 반란과 제도 간의 연결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이 질문은 두 가지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 하나는 지배권력에 맞선 투쟁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 만들기the making of the multitude의 측면이다.

[367.2]

첫번째 측면에서 무력은, 자유를 얻기 위해 요구된다. 지배권력이 그것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유대인 노예들은 모세와 함께 평화롭게 이집트를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그들이 싸우지 않고 떠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지배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때 폭력적으로 반응한다. Liberation은 지배권력에 맞선 방어적 투쟁을, 그러므로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진영들 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전투인 내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쟁조차도 치명적인 무기와 유혈사태를 늘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람시는 우리가 앞서 언급한 “기동전”(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습격이나 쿠바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 공격과 같은 무장반란이 그 전형이다)과 “진지전”(이는 일반적으로 문화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의 오랜 기간에 걸친 비무장 투쟁을 수반한다)의 구별과 함께 특정한 상황에 적합한 상이한 유형의 무력과 무기를 구분했다. 그람시는 원칙적으로 무장투쟁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점은 병기arms가 언제나 최선의 무기weapons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엇이 지배권력에 맞선 최선의 무기이냐 ― 총, 평화적 가두시위, 탈주, 언론캠페인, 노동파업, 젠더규범을 위반하기, 침묵, 풍자 등등 ― 하는 것은 상황에 달려있다.

[368.1]

우리는 “그것은 상황에 달려있다”라는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각의 상황에서 최선의 무기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최초의, 그리고 가장 분명한 기준은, 어떤 무기와 전략이 가장 효과적이고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장 센 화력을 보유한 쪽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사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에는 점점 더 무장부대보다는 “비무장 다중”이 효과적이고, 정면공격보다는 탈주가 더욱 강력하다. 이 맥락에서 탈주는 종종 사보타지, 협력의 철회, 대항문화적 실천, 일반화된 불복종 등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한 실천들은 효과적인데, 그 이유는 삶권력은 언제나 자신이 지배하는 주체성들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성들이 어떤 지형을 비우면 진공이 창출되는데, 삶권력은 그 진공을 견디지 못한다. 새로운 천년의 전환기에 활발하게 펼쳐졌던 대항지구화 운동들은 대체로 이러한 방식 ― 통제의 연속성에 균열을 내고, 그 결과 발생한 진공을 새로운 문화적 표현과 삶의 형태들로 채우기 ― 으로 기능했다. 그러한 운동들은 새로운 반란들이 취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불복종 전략, 새로운 민주주의의 언어, (평화, 환경 등을 위한) 윤리적 실천의 무기고를 남겨주었다.

[368.2]

첫번째 기준보다 두번째 기준, 즉 어떤 무기와 어떤 형태의 폭력이 다중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가 한층 더 중요하다. 전쟁의 수행은 언제나 주체성의 생산을 수반하는데, 종종 적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투쟁을 수행하는 이들 자신에게 가장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793년에 프랑스혁명의 폭력을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옹호했을 때, 토머스 제퍼슨은 바로 이 두번째 기준을 잊었던 것 같다. 그는 윌리엄 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 전체의 자유가 그 사건에 달려있었다. 순수한 피를 그토록 적게 흘리고도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던가? 이 대의를 위해 사라져간 순교자들은 내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혁명이 실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계의 절반이 황폐해지는 것을 보는 편을 원했을 것이다. 모든 나라에 오직 아담과 이브만 남는다해도, 자유롭게 남을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그게 더 나을 것이다.” 분명 우리는 제퍼슨이 여기서 나타내고 있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수용하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리고 확실히 제퍼슨 자신도 주어진 상황에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혁명적 행위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강화하고 다중 만들기 과정을 촉진해야 할 필요를 등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슬로건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유와 죽음”이라는 생각에 공감하지도 않는다.) 대규모 유혈사태라는 이슈는 차치하고, 정작 중요한 문제는 제퍼슨이 아담과 이브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인류를 어떤 상상된 원초적 조건, 자연적 조건, 출발점으로 되돌려서 벌거벗은 삶bare life이라는 관념에 만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제퍼슨은 우리와 비슷한 관점에서 아담과 이브가 혁명적 과정으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인류[인간성]의 창조를 표지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하튼 혁명적 투쟁에서 무기와 폭력의 형태를 평가함에 있어서, 적에 대한 효과의 문제는 언제나 다중과 다중의 제도 건설 과정에 대한 영향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369.1]

이는 혁명이 무력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두번째 측면으로 바로 우리를 이끈다. 두번째는 다중을 만들고, 다중 내의 갈등과 싸워서 그것을 해소하고,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을 한층 더 이로운 관계로 이끌 뿐만 아니라, liberation에 필요한 여러 변형들 앞에 놓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장이다. 제도의 무력[힘]이 어느 정도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생쥐스트는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1973년에 쓴 글에서 제도의 혁명적 기능을 주장한다. “테러가 우리에게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제거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부패로부터 구해줄 것인가? ... 제도가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현존하는 지배권력과 그것의 사회적 위계에 맞선 전투에 있어서 (테러는 말할 것도 없고) 무장투쟁이 갖는 유효성과 바람직함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으며, 생쥐스트의 위 발언의 첫 번째 부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의문시될 수 있다. 좀 더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부패에 맞선 제도의 무력[힘]을 긍정하는 두번째 부분이다. 물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생쥐스트가 부패를 혁명 지도자들이 수립한 노선으로부터의 이탈로, 제도를 순종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똑같이 부패에 맞선 제도라는 슬로건을 주장하고 싶다. 물론 매우 다른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말이다.

[370.1]

우리는 이 책의 여러 지점에서 공통적인 것의 부패를 분석했다. 그러한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하나는 사회적 위계의 부과를 통한(예컨대 사유화를 통한) 공통적인 것의 파괴라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다중의 힘을 감소시키고 주체성의 생산을 가로막으며 다중 내부의 갈등을 악화시키는 제도들 내에서 공통적인 것의 부정적 형태가 영속화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활동에는, 가족, 기업, 민족과 같은 공통적인 것의 부패한 형태들의 제도를 파괴하는 일이 하나의 부분으로서 포함된다. 그러한 제도들에 대한 투쟁은 다양한 전선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그 중 많은 부분은 우리가 여태껏 상상해보지도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 전투는 피한방울 없이도 충분히 폭력적이고 거칠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 예컨대, 재생산 권리, 섹슈얼리티, 혈연구조, 성별 노동분업, 가부장적 권위 등의 측면에서 가족이라는 부패한 제도를 보잘 것 없는 방식으로라도 위혐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처벌이 가해지는지를 생각해보라. 공통적인 것을 부패시키는 제도들은 강렬하고 광범위한 싸움 없이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쥐스트는 투쟁이 부패한 제도들의 파괴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축도 수반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제도들은 부패와 싸워야 한다. 새로운 제도들은, 사회를 통일시키고 사회적 규범에의 순응성을 창조함으로써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이로운 형태들의 생산을 활성화하고,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개방적이고 평등한 상태로 유지하며,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의 기쁜 마주침을 촉진함으로써 ―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러한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들과 싸움으로써 ― 부패와 싸워야 한다. 이는 사랑의 훈련은 악과 싸울 수단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우리의 앞선 제안을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다시 진술한 것일 뿐이다.

[371.1]

혁명가들이 만나게 되는 가장 무시무시한 폭력은 혁명적인 정체성 정치에서 발견되는 괴물스러운 자기변형일 것이다. 정체성을 폐지하는 것, 현재의 자신을 떠나는 것 그리고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를 비롯한 어떠한 정체성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은 엄청나게 폭력적인 과정이다. 이는 지배권력이 그러한 길의 매걸음걸음마다 싸움을 걸어올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의 핵심적인 자아정체성 중 일부를 포기하고 괴물이 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쥐스트와 피로 얼룩진 그의 동료들조차도 그러한 테러[공포]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onweal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6.3.1. 이행의 문제  (0) 2010/09/06
6.3.2 혁명적 폭력  (0) 2010/09/04
6.2.3. 반란과 제도  (0) 2010/08/30
6.2.2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0) 2010/08/28
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0) 2010/08/21
6.1.3 혁명적 아쌍블라주들  (0) 2010/08/21



355-1.
반란은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제도적 과정 속에서 지속되어야 하고 공고해져야 한다. 물론 반란에 대한 그런 제도적인 생각이 기존의 쿠데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국가제도들을 그에 필적하고 상응하는 제도들로 대체할 뿐이다. 우리가 말했듯이 다중은 국가장치들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심지어 그 장치들을 여타의 목적을 향하도록 하는 데조차도 관심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중이 국가장치들을 손에 넣길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을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다중은 국가를 자유의 왕국으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를 보장하고 소유가 행하는 통치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정체성의 위계들을 유지하고 보호(police)하는 지배의 장(seat)으로 여긴다. 국가제도들과의 정치적 연계가 종속에 대항하는 투쟁들에 유용하며 필요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해방은 그것들의 파괴를 목적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반란이 제도에 반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했듯이 사실 반란은 제도들을, 다른 종류의 적절한(just) 제도들을 필요로 한다.   

355-2.
사회이론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분할은 사회계약을 기초로 생각하는 주류 노선을 사회갈등을 제도들의 기초로 간주하는 비주류 노선에 맞서는 것으로 놓는다. 주류 노선이 갈등을 사회 바깥으로 던져버림으로써 (당신이 계약에 대한 동의하면 당신은 반란과 갈등을 일으킬 권리를 빼앗긴다) 사회적 통일을 유지하고자 하는 반면, 비주류 노선은 갈등을 사회에 내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불변의 토대로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토머스 제퍼슨은 그가 다중이 주기적으로 적어도 세대(그는 ‘20년 마다’라고 생각한다)마다 한번씩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야 하며 새로운 헌법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러한 사상의 비주류 노선에 기여한다. 비주류 노선의 다른 중요한 두 지지자인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는 권위와 억압에 맞서 분명하게 정의된 저항과 반란(rebellion)의 길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다중 안에서의 균열되고 변화하는 갈등의 길을 따라 제도들을 근거짓는 갈등을 생각한다. 비주류 노선의 저자들은 사회적 제도들의 발전이 갈등에 열려있고, 또 갈등에 의해 구성될 때에만 민주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56-1.  
우리가 제도들을 주류 노선을 따라서만 생각하는 한, 반란은 교착상태에 가로막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제도적 지속성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반역(revolt)과 반란(rebellion)은 속히 지배질서에 뒤덮이고 그 안으로 흡수된다. 웅덩이에 떨어지지만 즉시 원상복구되는 고요한 수면을 볼 뿐인 돌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체성에 기반한 제도의 지배적 형태로 돌입하는 것은 대의를 통해 작용하고, 통일과 일치를 요구하며, 반역에 의해 열린 사회적 파열을 중화하는 데 복무한다. 우리는 정부[수립] 선포에 돌입하는 반란의 지도자들의 말을 얼마나 여러 번 들었던가? “여러분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대표하겠습니다.” 그러나 비주류 노선에 따르면, 갈등에 기반한 제도적 과정은 그 파열의 힘과 권력을 부정하지 않고도 반란을 공고히 할 수 있다. 앞서 자끄리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살펴보았듯이, 반란은 그것이 일단의 새로운 집단적 습관들과 실천들, 즉 새로운 삶 형태를 창안하고 제도화할 때에만 강력해질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가령 장 쥬네는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요르단의 페다이들과 미국의 블랙팬써들 사이를 여행하는 중에 이 집단들의 “스타일”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쥬네가 그들의 독특한 제스처와 정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행한 새로운 삶 형태의 창안, 공통의 실천들과 행위들을 의미한 바이다. 우리에게 역사가들의 재능과 도구가 있다면, 현대의 다양한 봉기들이 어떻게 대안적인 제도적 형태들로 공고해져왔는지를 연구하는 데 분명 유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69년 뉴욕에서의 스톤월 반란[각주:1]의 파열적(disruptive) 힘이 다양한 게이․레즈비언 조직의 형성을 통해 어떻게 지속되었는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는 남아공의 투쟁이 일어나는 동안 1976년의 쏘웨토 봉기[각주:2] 같은 반란들이 어떻게 제도적 과정의 짜임새의 일부가 되었는지, 1970년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그 중에서도 특히 포르또 마르게라, 피렐리, 피아뜨 공장에서 있었던) 반란들이 노동자의회와 다른 정치적 제도들의 새로운 형태를 구축함으로써 어떻게 지속되고 발전되었는지, 혹은 1994년 멕시코에서 싸빠띠스따 봉기가 자율적 모임들(까라꼴 또는 기초적인 공동체구조, 그리고 좋은 정부 협의회[각주:3])을 창조함으로써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말이다. 핵심은 각 사례에서 그 제도적 과정이 어떻게 반란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파열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확장하며 발전시키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357-1.
이제 우리는 제도의 새로운 정의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곁에 두고 있다. 제도들은 그것들이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적 파열을 확장하는 동시에 내적 불화에 열려있다는 의미에서 갈등에 기반한다. 또한 제도들은 삶 형태를 가리키는 집단적 습관들, 실천들, 그리고 능력들을 공고히 한다. 끝으로 제도들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형된다는 점에서 제약이 없다. 제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특이성들의 다양체를 축소시키지 않고 특이성들이 그 마주침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맥락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앞서 “사랑의 훈련”이라고 불렀던 것과 밀접하게 상응한다. 그것은 특이성들의 힘을 감소시키는 부정적인 마주침들을 피하고, 그 힘을 증가시키는 기쁜 마주침들을 지속시키며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되는 제도들은 반란과 혁명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357-2. 
우리는 싸이버네틱 네트워크에서의 생산적 활동에 대한 공통적 경험들에 기반을 둔, 제도에 대한 유사한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네트워크의 정치적 함의에 대한 몇몇 초기 저작들의 열정을 특징짓는 일련의 신화들(네트워크는 통제될 수 없다, 네트워크의 노골성(transparency)은 언제나 선하다, 싸이버네틱 떼는 늘 똑똑하다)에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테크놀로지의 경험은 다양체와 상호작용으로 특징지워지는 새로운 의사결정 과정들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오래된 사회주의 엘리트들은 “의사결정 기계”를 꿈꾸었던 반면, 네트워커들과 네트유저들의 경험은 무수한 미시정치적 길들로 이루어진 제도적 의사결정을 이루었다. “미디어가 되어라”는 네트워크에서의 표현에 대한 집단적 통제가 정치적 무기가 되는, 소통의 제도적 구축이라는 노선이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갈등과 다양체를 통해 정의되고 집단적 습관들과 실천들로 이루어지며 특이성들의 변형에 열려 있는 제도에 대한 정의를 발견한다.

358-1.
우리가 내린 제도의 정의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이의가 떠오르는데, 그것은 정말이지 사회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표준적으로 상정하는 것과 우리가 내린 정의 간의 거리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제도들과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의 개체성과 정체성을 적실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회학적 이의를 상상해본다. 실제로 관습적인 사회학적 관념에 따르면 개인들은 제도들 안으로 들어가서 정체성으로서 나온다. 달리 말해, 가령 사랑에 대한 욕망을 결혼으로 풀고 자유에 대한 욕망을 쇼핑으로 푸는 그런 삶의 공식들을 개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제도들은 개인들이 [미리] 확립된 행위의 유형들을 따르도록 조용히 강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된 행위유형들은 결코 사회 전체의 획일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인종․젠더․계급 속성에 따르도록 (마치 그 속성들이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양) 강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정체성 형성을 규정한다. 이와 반대로, 제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개인에서 출발하지도 정체성으로 끝나지도 않으며, 순응을 통해 작용하지도 않는다. 지배권력에 맞선 반란 속에 있고 종종 상호갈등 속에 있는 특이성들은 제도적 과정에 돌입한다. 우리가 말한 그대로, 특이성들은 항상 이미 다수적이며 자기변형의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제도적 과정은 이처럼 삶 형태를 창조함으로써 특이성들이 그 상호작용과 행위들의 어떤 일관성을 달성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정체성에 고정된 그런 유형들이 아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도 동인(動因)의 소재와 관련될 것이다. 관습적인 사회학적 관념에 따르면 제도들은 개인들과 정체성들을 형성하는 반면, 우리의 생각에서는 특이성들이 그 결과 영구히 유동적인 제도들을 형성한다. 

359-1.
우리는 제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주권의 기초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정치학자들과 법이론가들의 이의를 상상해본다. 이러한 관점은 경제적․사회적 세계에서의 개인들의 삶이 자연상태에서와 같이 위기와 위험, 그리고 희소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상정한다. 개인들은 제도에 돌입할 때에만, 그리고 그럼으로써 적어도 그들의 권리와 권력의 일부를 주권적 권위로 이전할 때에만,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다. 법이론가들은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법적 요구와 의무 간의 관계가 제도에 있어 불변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할 때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제도들은 구성된(constituted) 권력의 토대로서, 즉 주권의 입헌적(constitutional) 질서로서 복무해야한다. 이와 반대로, 우리의 생각에 따르면 제도들은 구성된 권력보다 구성적(constituent) 권력을 형성한다. 제도적 규범들과 의무들은 규칙적인 상호작용들로 확립되지만, 그것들은 진화의 과정에 지속적으로 열려있다.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은 자신의 권리나 권력을 이전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주권권력의 형성을 금하지만, 각각은 특이성들의 상호적 마주침 속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따라서 제도적 과정은 다중이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주요한 위험에 맞서 보호의 (그러나 보장은 없는)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그 위험은 외적으로는 지배권력의 억압이며, 내적으로는 다중 안에 있는 특이성들 간의 파괴적 갈등들이다. 

359-2.
반란을 사회적 존재의 짜임새를 변형하는 제도적 과정으로 확대하는 것―이는 혁명을 정의하려는 최초의 것으로서 훌륭하다. 칸트가 프랑스 혁명은 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자연법에 토대를 둔 헌법의 진화”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선언할 때 그는 이 정의에 가까이 간다. 그는 특히 그 과정의 공적, 보편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 사건의 핵심은 인간이 행한 중요한 행동들이나 범죄들에 있지 않으며 ... 다른 것이 땅 속에서 솟아오른 듯이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하나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사라지는 화려한 구식의 정치적 구조들에 있지도 않다. 정말이지 이런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혁명들의 게임에서 스스로를 공적으로 드러내며 혁명과 관련된 사람들 한쪽을 다른 한쪽에 반해서 그렇게 보편적이면서도 사심없이 편드는 것은 단지 보는 사람들의 사유방식이다.” 혁명은 반란이 일단 제도적 과정이 된 것이며 통치(정부)의 한 형태이다. 이를 칸트는 공적인 것이라고 정의하며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라고 부를 것이다.[각주:4] 


360-1.
칸트는 계속해서 사회적 존재를 혁명이 변형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혁신을 구성하며 미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 보편성 때문에 이러한 사유방식은 인류 전체의 성격을 일거에 보여주며, 동시에 그 사심없음 때문에 인류의 적어도 경향적인 도덕적 성격, 인간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향한 진보를 희망하게 해줄 뿐 아니라 그 능력이 현재에 대하여 충분한 한에서 이미 그 자체가 진보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의 새로운 형태로서의 혁명은 실상 진보에 대한 칸트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미래 사이에 꽉 물려있으며 기동할 수 있는 여지를 별로 남기지 않는다. 혁명은 이미 구성된 권력의 압박과 항상 싸워야하며, 과거의 축적된 사회적 무게와 항상 싸워야 한다. 예를 들어 혁명가들이 성자들과 왕들의 머리들을 떼어냄으로써 모독한 프랑스와 까딸루냐의 성당들의 고딕 양식의 앞면을 생각해보라. 그렇다. 귀중한 문화유산을 그들이 파괴한 것에 우리도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권력의 상징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이해한다.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우리를 미래로 출발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때조차도 과거는 종종 돌입하여 다시 우리에게 자신을 부과한다. 예를 들어 토끄빌은 과거가 때로 어떻게 혁명적 미래에 몰래 다시 나타나는가를 서술한다. 그러나 이는 반동적인 인물들이 종종 주장하듯이 역사의 법칙이나 혁명의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가능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보가 첫째, 자연적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혁명적 투쟁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제시될 때, 둘째, 제도적 형태로 공고화되고 강화될 때 진보에 대한 칸트의 신념을 공유할 수 있다. 혁명이 새로운 형태의 통치를 창출하는 것은 과거를 저지하고 미래를 향해 여는 것이다.[각주:5] 
   


  1.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337.html [본문으로]
  2.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C%9B%A8%ED%86%A0_%ED%95%AD%EC%9F%81 [본문으로]
  3. 해리 클리버는 juntas를 councils로 번역하고, caracoles과 juntas를 “다양한 자율적 공동체들 간의 활동들을 조정하기 위한 지방정부 조직”이라고 표현한다.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385&p_no=7&key=%C1%C1%C0%BA+%C1%A4%BA%CE) [본문으로]
  4. 도도님의 번역을 옮김. (http://minamjah.tistory.com/16) [본문으로]
  5. 각주 4와 같음.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Commonweal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6.3.1. 이행의 문제  (0) 2010/09/06
6.3.2 혁명적 폭력  (0) 2010/09/04
6.2.3. 반란과 제도  (0) 2010/08/30
6.2.2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0) 2010/08/28
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0) 2010/08/21
6.1.3 혁명적 아쌍블라주들  (0) 2010/08/21

연구공간 L Commonwealth 세미나

6.2.2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349.1]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은 정체성들의 평행적 투쟁을 특이성들을 다중으로 구성하는 반란적 교차, 혁명적 사건으로 변형한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 관한 위의 정의는 올바른 것이긴 해도 당혹스럽게 소박한 것이다. 그러한 개념적 추상은 결코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구성의 뒤에 있는 열망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열망들 중 몇몇은 완전히 혁명의 방향에로 향해있지만, liberation 운동은 또한 언제나 억압받는 자들 간의 내적 대립과 오해에 의해서 역병에 걸린다. 평행적 행로 사이에서 의사소통하는 번역의 과정은 종종 오역의 불협화음으로 붕괴한다. 불화는 혁명적 운동의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조건이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과제는 그러므로 liberation 행로를 기획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다중 안에서의 대립들을 해소하기 위한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의사결정이 다중 만들기와 혁명 과정을 지속적으로 진척시키도록 구축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해야 될 필요가 있다.

 

[350.1] 우리가 다중 만들기에 기여하는 교차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전통적으로 동맹 혹은 제휴로서 이해된 것과는 상이한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중은 공통적인 것 안에서 특이성들의 마주침을 통해 구성된다. 물론 동맹과 제휴의 운동은, 종종 상이한 사회적 그룹들의 평행적인 종속 및 투쟁에 대한 인식과 함께, 공통의 적에 맞서서 구성된다. 하지만 동맹과 제휴는 결코 emancipation을 위해 분투하는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설 수 없다. 반란적 교차로 성취된 절합의 과정은 단순히 정체성들을 짝짓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 간에 공통적인 것을 수립하는 liberation 과정 속에서 특이성들을 변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합은 다중 만들기 안에서 사회적 존재를 변형하는 존재론적 과정이다. 다중 만들기는 공통적인 것을 나누고 공유하는 분유(partage)의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다중 만들기와 반란의 사건은 용해나 통일의 과정이 아니다. 다중 만들기와 반란의 사건은 오히려 공통적인 것 안에서의 영속적인 마주침에 의하여 구성되는 특이성들의 증식을 작동시킨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은 이러한 절합 및 구성의 과정을 결정하고 지지해야만 한다.

[350.2] 이 지점에서 우리가 여기서 제기한 혁명에 대한 파악이 20세기 코뮤니즘 운동이 제안했고 실천했던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전통의 주류는 새로운 정체성의 창조라는 면에서 반란 및 혁명을 제시한다. 사회의 나머지와 구분되며 사회의 나머지를 선도할 수 있는 전위적 주체로서의 새로운 정체성말이다. 가령 레닌은, 어떤 점에서는 그것이 반대하는 중앙 권력의 정체성을 반영하면서, 대항권력을 형성하는 당의 헤게모니 아래 투쟁하는 사회 그룹들의 절합을 인식한다. 러시아 혁명과정을 상술하면서 트로츠키는 유사하게 대중의 자발성에 관한 소박한 생각에 대해 경고한다. 그가 주장하길 대중 반란은 계획과 의사결정에 책임지는 혁명적 지도력의 ‘모의’를 요구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파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의 실재에 손을 대기 위한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수단일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이 생산한 다양한 입장들보다 혁명적 행위를 위한 결정에 도달하는 데 보다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주체성론과 혁명적 의사결정론으로서는 우리의 현대 세계에는 완전히 부적합하다. 필요한 것은 혁명적 의사결정을 수립하는 조직적 과정 및 (위로부터가 아닌) 다중 운동 안에서부터의 지배 권력의 전복이다.

 

[351.1] 코뮤니즘 전통은 노동과 생산의 변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오늘날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위한 새로운 잠재력을 탐구하는 데 유용한 방법을 제공한다. 앞서 3장에서 우리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관계― 과 관련하여 (사실은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인) 자본의 변화하는 기술적 구성을 검토하였다. 이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구성과 관련하여 그것의 기술적 구성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용어법이 애매하게 들리게끔 할지도 모르지만, 기초적 전제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즉 사람들이 노동에서 하는 것과 노동에서 그들이 실행하는 기술들 ―기술적 구성― 이 정치적 행위의 영역에서 그들의 능력 ―정치적 구성― 에 기여한다는 것. 만약 프롤레타리아의 기술적 구성이 삶정치적 생산이 헤게모니적으로 되고 그 질들이 생산부문에 도입되어 변화한다면, 삶정치적 노동에 특수한 능력들에 상응하는 새로운 정치적 구성이 가능하다. 기술적 구성의 변형이 자발적으로 (조직화와 정치적 행위를 요구하는) 투쟁과 혁명의 새로운 정치적 형상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포착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지시한다.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의 본성과 질들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이 정의하는 정치적 구성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352.1] 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의 관계를 제기하는 것이, 전위적 조직화에 대한 물음을 대단히 상이하게 조망하면서 그것을 역사화한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대략적 시대구분을 그려서 해명될 수 있다. 전문노동자의 위계적 서열이 산업생산을 특징지은 20세기 초에는 볼셰비키당, 독일의 인민위원회, 그리고 다양한 평의회운동들이 저 기술적 구성을 해석하는 정치적 형상을 제공한다. 공장에서의 전문노동자 전위에 상응하는 전위당. 상대적으로 탈숙련된 노동자 대중이 산업생산을 특징지은 20세기 중반에는 노동조합을 단순히 당을 위한 ‘전동벨트’로 다루면서 그리고 산업생산을 봉쇄하는 것과 봉급 및 사회적 복지의 지속적 상승을 요구하는 것 간의 양자택일이라는 전략을 채택하면서, 대중정당이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정치적 형상을 창조하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술적 구성과 정치적 구성의 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정치적 조직화를 타당하게 만드는 것인데, 그러한 주장이 생산적 노동자의 조직화 및 그들의 능력들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면서, 정치적 조직화가 그 상황의 실재에 뿌리내리는 방식을 인식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노동의 기술적 구성이 심오하게 변화된 오늘날에, 어떠한 전위적인 정치형태를 다시 제안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이다.

 

[352.2] 오늘날 출현하고 있는 삶정치적 생산의 헤게모니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능력을 수반한다. 중복되는 세 가지 발전들이 여기서 중요하다. 첫째로 산업생산의 헤게모니 시대에 자본가는 일반적으로 노동자에게 생산을 조직하는 협동의 수단들과 도식들을 제공했지만, 삶정치적 생산에서는 노동이 점점 더 협동을 창출하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둘째 삶정치적 노동은 생산을 봉쇄하고 그것이 개입할 때마다 생산성을 축소시키는 자본가의 명령으로부터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된다. 셋째로 자본가의 명령이 지시하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협동 형태와 대조적으로, 삶정치적 노동은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태를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 삶정치적 노동의 이러한 세 가지 특징들 ―협동, 자율, 그리고 네트워크적 조직화― 이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조직화를 위한 견고한 구성요소들을 제공한다. 사람들이이 노동에서 사장을 필요하게끔 훈육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한 정치에서의 사장을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주장을 상기해보라. 오늘날의 삶정치적 생산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노동에서 사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의사소통하고 협동하기 위한 확장적 웹을 필요로 한다. 사장은 점점 더 단지 노동의 장애물일 뿐이다. 노동의 기술적 구성에 관한 초점은 그리하여 우리에게 사람들이 일상적 삶에서 실행하는 민주주의적 능력들에 관한 하나의 전망을 부여한다. 노동의 이러한 민주주의적 능력들이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조직화의 창조에로 번역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조직화를 상상하고 창조하기 위한 견고한 토대를 제시한다.

 

[353.1] 우리는 현대적인 민주주의적 조직화 형태가 전위적 조직화와 관련하여 제시하는 중요한 전략적 진전에 주목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전위는 혁명 과정에 시동을 걸어 자본주의 체계를 탈안정화하는 책무를 지녔었다. 반스탈린주의적이었으며 국가 코뮤니즘 의회당에 반대했던 1970년대 서부 유럽의 코뮤니즘 운동 및 자율주의 운동은 이러한 제의를 새로 만들고 확장했다. 자본주의를 탈안정화하는 전술은, 자본주의 사회의 위계와 명령의 틀을 허물어 자본주의 사회를 심오하게 탈구조화하는 전략에 의해 보완되어야만 한다. 삶정치적 노동이 제안하는 민주주의적 조직화 형태는 혁명 활동의 정의에 또 다른 요소를 첨가한다.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구성하려는 기획이 그것이다. 따라서 혁명은 새로운 사회적 삶의 형태 발생을 목표로 한다. 삶정치적 영역에서 결정을 위해 요구되는 지식과 의지는, 말하자면, 역사적 존재에 새겨지며, 그리하여 의사결정이 언제나 수행적이고 그에 참여한 주체의 실질적, 인류학적 변형으로 귀결되는 정도로, 혹은 의사결정 조건의 존재론적 변형 그 자체인 정도로 역사적 존재에 새겨지는 것이다.

 

[354.1] 몇몇 독자들은 우리의 방법이 여기서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결합시킨 방식 때문에 불편해 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마치 우리가 경제적 힘들이 사회적 삶의 다른 모든 영역을 결정한다고 믿는 듯이, 우리에게 경제주의의 혐의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노동에서 표현되는 기질, 능력, 기술을 탐구하는 것이 다중의 일상적으로 일반화된 능력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단지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그러나 중요한 하나이다. 아렌트는 그녀가 (명령에 따른 작업의 기계적 반복과 같은) 노동 능력이 자율, 의사소통, 협동, 그리고 창조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삶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치적 삶과 경제적인 것의 연관성을 경시한다. 하지만 삶정치적 노동은 점점 더 이러한 고유하게 정치적 능력들로 정의되며, 그리하여 경제영역에서 출현하고 있는 이러한 능력들은, 사실상 두 영역간의 점점 더 광범위한 중첩을 드러내면서, 정치영역에서의 민주주의적 조직화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논의는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하는 혁명적 호소의 오랜 노선 안에 자리매김될 수 있다.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결합하는 우리의 슬로건은 ‘가난과 사랑’ 혹은 ‘힘과 공통적인 것’일 것이다. 빈자의 liberation과 사회적 협동의 힘의 제도적 발전. 어느 경우든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교차를 인식하는 것은 현대의 사회적 삶을 기술하는 데 본질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의 메커니즘과 실천을 구성하는 데 근본적인 것이기도 하다.


'<Commonweal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6.3.2 혁명적 폭력  (0) 2010/09/04
6.2.3. 반란과 제도  (0) 2010/08/30
6.2.2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0) 2010/08/28
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0) 2010/08/21
6.1.3 혁명적 아쌍블라주들  (0) 2010/08/21
인간에 대하여 2: 문턱을 넘어서!  (0) 2010/08/07




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332.1 앞의 두 가지 과제를 지지하고 정체성의 반란적 기능을 계속해서 전진시키고, 정체성의 정치를 혁명적 기획을 향해 밀어붙이려면 세 번째 정치적 과제, 즉 정체성 정치 그 자체의 지양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체성의 자기 지양은 어떻게 혁명의 정치학이 정체성으로 시작하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이러한 역설적 과정은 변증법적 부정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곧 보게 될 바와 같이 자기 변형과 변이의 엄밀하게 긍정적인 운동이다. 나아가 이는 페미니즘, 인종 정치, 계급 정치 를 비롯한 여타 정체성 정치의 혁명적 흐름과 그 외의 모든 비혁명적 판본을 구별짓는 기준이다.

332.2 혁명적 꼬뮤니즘 전통은 이러한 역설적 제안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사례를 제공한다. 이 전통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으로서 자기 자신의 폐지를 결심하는 한에서 인류 역사의 진정 혁명적인 첫 번째 계급이다. 귀족정과 모든 선행하는 지배 계급이 그러했듯이 부르주아는 계속해서 그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 마리오 트론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해서 노동 계급은 자신이 자본인 한에서 자기 자신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노동에 대항하는 노동자 투쟁, 노동자에 대항하는 노동자 그 자신의 투쟁”―바꿔 말하면 그 자신의 정체성의 지양을 겨냥하는 정체성 정치. 이 꼬뮤니즘적 제안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자는 그들 자신의 파괴가 아니라 신을 노동자로 규정하는 정체성의 파괴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계급 투쟁의 첫 번째 목표는 자본가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특권과 권위를 지탱하는 사회적 구조와 제도를 허물어뜨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를 종속시키는 조건들을 폐지하는 것이다. 노동 거부는 이러한 기획의 중심적 슬로건이다. 노동거부와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지양은 생산 및 혁신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창조적 힘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고 용이하게 하는, 아직 상상되지 않은 생산 관계들의 발명을 의미한다. 노동자 정체성을 넘어서는 이러한 운동은 노동자로서의 종속을 결정하는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구조적 ․ 제도적 형태를 가시화하고 이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면서, 앞의 두 과제를 함축하고 또 이를 더 밀어붙인다. 여기에 노동자 정체성의 인정이나 긍정, 재산으로서의 정체성의 소유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정체성의 지양을 겨냥하는 무기로서 정체성의 소유가 아니라면 말이다. 정체성 지양 기획은 따라서 사적 소유와 국가의 지양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충족한다. 혁명적 코뮤니즘이 해방이 아닌 자유화의 기획이려면 그것은 노동자 정체성을 넘어서는 자기 변형의 과정을 작동시켜야 한다.

333.1 이러한 정식화는 혁명적 계급정치와 혁명적이지 않은 계급 정치 형태의 구별을 명백하게 한다. 혁명적 정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 내에서 노동자 조건의 개선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더 나은 노동 조건, 더 많은 임금, 강화된 사회 서비스, 통치에 있어서 훨씬 더 많은 대의를 비롯한 개혁을 획득함으로써 노동자는 인정받을 수 있으며 심지어 해방을 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오직 노동자 정체성을 보존함으로써만 그러하다. 혁명적 계급 정치는 주체성 생산과 사회적 제도적 혁신 과정을 가동시키면서 노동자를 종속시키는 구조와 제도들을 파괴하고 따라서 노동자 정체성 그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 혁명적 계급정치는 노동자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권력을 차지하여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 이전의 사회적 계급을 대신해 권좌를 차지하는 오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또한 혁명적 계급정치는 모든 사람을 부르주아 혹은 프롤레타리아로 만들면서 현존하는 계급 정체성 중 하나를 보편화함으로써 사회적 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삼지도 않는다. 이 모든 비혁명적 기획들은 노동자 정체성을 고스란히 남겨두지만, 혁명적 과정은 이를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가 없는 사회는 어떠할 것이며, 대체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공통적 부의 자율적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의 5부와 이 책 전체에 걸쳐 탐구하고자 했던 바이다.

334.1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 지양이 앞서 언급한 정체성 정치의 두 가지 과제의 기반을 침식하고 혼돈과 사회적 무차별성의 심연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근심을 부디 보류하라. 곧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다른 정체성 영역에 확장하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정체성의 자기 지양이 어떻게 혁명적인 것을 규정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34.2 혁명적 페미니즘은 그것이 젠더의 지양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 의해서 여타의 페미니즘 지평들과 구별된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폭로하며, 가부장제적 사회제도에 대항해 반란을일으키고, 여성의 평등과 해방을 요구하는 것에 더해서 혁명적 페미니즘은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의 폐지를 추구한다. 웬디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우리가 새로운 여성 및 남성이 될 수 있다고, 젠더를 생산하는 조건을 말그대로 조절하여 젠더를 다르게 생산할 수 있다고, 법과 다른 제도들에서 젠더적 편견을 축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젠더를 넘어서 생산될 수 있다”고 약속한다. 그보다 앞서 가일 루빈Guyle Rubin은 “젠더를 만들어내는 사회 시스템의 폐지”를 목표로 분명히 표현한 바 있다. 린다 제릴리의 작업과 같은, 오늘날 “자유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조류는 혁명적 페미니즘에 대한 이러한 사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유에 대한 추구가 해방이 아닌 자유화의 과정으로, 젠더 정체성을 보존하거나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양하고 젠저 관계를 변형시키는 과정으로 생각되는 한에서 말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이러한 혁명적 제안을 “젠더없는 괴물스러운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꿈”이라 부른다. 혁명적 기획은 해방의 개혁주의적 전망(젠더적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젠더적 위계가 없는 세계)을 넘어서 정체성 자체의 폐지를 지향한다. 차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 실은 특이성들의 확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젠더로 인지하는 바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페미니즘은 따라서 라블레적인 의미에서 괴물적이다. 그것은 창조와 발명의 힘으로 넘쳐흐른다.

335.1 이러한 지평에서 볼 때 퀴어 정치는, 퀴어 정치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인 마이클 워너, 주디스 버틀러, 이브 세지위크 같은 이들의 작업 속에서 퀴어 정치학이 정체성 정치를 정체성 비판과 불가분하게 연결지은 이래로, 정체성 정치의 가장 명백하게 혁명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퀴어 정치는 다른 젠더적 위계와 함께 이성애규범성과 동성애 혐오의 폭력성과 종속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정체성으로서의 여성, 남성 및 여타의 젠더 정체성과 함께 “동성애자” 또한 지양하고자 한다. 안나마리 Jagos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퀴어는 그 자신의 공고화나 심지어 안정화에 조차도 아무런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정체성 범주이다.... 퀴어는 정체성이라기보다 정체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저자들과 오늘날 공적 담론 속에서 점점 더 “퀴어”는 정체성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정체성 범주로, 종종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의 줄임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정체성 영역에서 비혁명적 조류와 혁명적 조류 사이의 개념적(이고 정치적인) 분열을 확인하였듯이, 퀴어 이론과 퀴어 정치학의 영역 또한 퀴어를 정체성으로 긍정하는 옹호 기획과 퀴어를 모든 젠더 정체성을 침식하고 폐지하며 일련의 되기를 작동시키는 반 정체성으로 이용하는 제안들로 쪼개어져 있다.

335.2 흑인 급진주의 또한 다른 정체성 부문에서와 유사한 혁명적 계획에 입각한 강력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항한 반란을 흑인임을 지양하는 과정으로 보완한다. 파농은 초창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유색인의 그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화 없는 자유화는 무의미하다.” 그 자신으로부터의 자유화는 정체성의 자기 지양이다—이는 인종적 위계의 파괴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바의 인종의 폐지를, 따라서 파농의 관점에 따르면,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를 표시한다. 이러한 점에서 말콤 엑스와 휴이 뉴튼이, 정체성에 대한 민족주의적 긍정과 혁명적 기획 사이의 갈등을 깨달았을 때, 자신들이 이전에 옹호했던 흑인 민족주의적 입장을 문제시하고 거기에서부터 한 발 물러섰다는 것은 흥미롭다. 특히 뉴튼은 인종적 정체성과 그것의 종속의 구조의 폐지를 함축하는 자유화를 위한 정치적 틀을 나타내려는 노력속에서, 민족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마침내는 “간-공동체주의”로 혁명의 틀을 점차 바꿨다. 인종은 사유의 대상으로서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위계, 분리, 지배의 사회적 구조와 제도로서 파괴되어야 한다. 정체성의 폐지는 다시 한번, 소유와 주권의 폐지를 함축한다. 종속의 정체성으로서의 흑인임 뿐 아니라 백인 및 다른 모든 인종적 정체성과 함께 흑인임 자체를 폐지하는 자유화의 기획만이 새로운 인간성의 창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336.1 정체성 정치에서 출현한 이러한 유사한 혁명적 제안들은 두 가지 중요한 비판에 맞닥뜨린다. 첫 번째 비판은, 정체성을 폐지하자는 제안이 사회적 억압을 폭로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정체성 정치의 능력을 침식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세 번째 임무가 앞선 두 가지 과제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평에서 볼 때, 정체성을 폐지하려는 노력은 정체성과 그 위계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지배적이고 반동적인 전략에 힘을 불어넣어줄 뿐이다. 이러한 비판은 세 가지 과제들이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앞의 두 과제 없이 세 번째 과제를 추구하는 것은 순진하고 현존하는 위계에 저항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세 번째 과제 없이는, 앞의 두 가지 과제는 정체성 공식에 얽매여 자유화의 과정을 작동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설명의 명료함을 위해 세 가지 과제를 차례로 제시하긴 했지만 세 가지 과제들은, 예컨대 혁명적 계기를 어떤 막연한 미래로 유예함이 없이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337.1 다양한 정체성 부문에서 혁명적 제안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차이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그것은 정체성의 지양이 차이 그 자체의 파괴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정체성의 지양이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만드는, 차이 자체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대로 정체성의 지양은 차이—사회적 위계의 자국이 남지 않은 차이—의 방면과 확산을 일으킨다. 두 개의 젠더 정체성과 함께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지양되면 다양한 성적 차이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올 것이다.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했듯이, 두 개의 성 혹은 0개의 성이 아니라 n개의 성들이. 폴 길로이 또한 이와 유사하게 차이의 확산으로 특징지어지는 비인종적 사회를 생각하기 위해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가 설명하길, 디아스포라의 조건과 지평은 고정불변의 기원이나 순수하고 확고한 정체성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함축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혼합과 운동이 가능하게 하는 풍요로움과 사회적 창조성을 조명한다. 그래서 길로이는 “공생공락conviviality”, 즉 사회적 차이들이 함께 거주하고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사회를 그린다. 그는 영국 메트로폴리스의 다문화적 사회적 삶 속에서 이러한 상황이 출현하고 있음을 본다. 혁명적 기획은 확산하는 차이들 사이에 공생공락을 창조해야만 한다.

338.1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체성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여기서 분석하고 있는 과정에 대한 더 적합한 개념은 특이성이기 때문이다. 특이성은 유럽적 사유 속에서 둔스 스코투스에서 스피노자, 니체와 들뢰즈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정체성에 대하여, 특이성은 세 가지 주요한 특징으로 규정된다. 이 세 가지 특징들은 내재적으로 특이성을 다양성과 연결시킨다. 우선 모든 특이성은 그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가리키며 또 그에 의해 규정된다. 어떤 특이성도 홀로 존재하거나 사유될 수 없다. 특이성의 존재와 규정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특이성들과 맺는 관계로부터 유래한다. 둘째, 모든 특이성은 자신 안의 다양성을 가리킨다. 각각의 특이성을 무수히 잘라도 그것은 특이성의 규정을 침식하지 않고 구성한다. 셋째, 특이성은 항상 다르게 되기의 과정, 즉 시간의 다양성에 관여한다. 이 특징은 앞의 두 가지 특징으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사회적 다양성을 이루는 다른 특이성들과의 관계와 각각의 특이성 안의 다양성의 내적 구성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339.1 정체성으로 특이성으로 지평을 바꾸면 과정의 혁명적 계기가 명료해진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이러한 과정은 자기 지양이라는 부정적, 역설적 관점으로 이해되는 반면, 특이성의 관점에서 과정은 변형의 계기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는, 혁명적 과정이 차이의 확산을 낳는 이유가 미스테리가 아니다. 다르게 되는 것이 특이성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특이성 개념은 따라서 정체성 담론을 너무 자주 오염시켜 온 모든 변증법적 환상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이점 또한 가지고 있다. 특이성은 다양성들의 장으로서 공통적인 것을 지시하고 따라서 소유의 논리를 부순다. 소유에게 있어서 정체성과 같은 것이 공통적인 것에 있어서는 특이성이다. 따라서 정체성과 특이성의 구별은 우리가 앞서 인용한 자유 획득에 대한 두 가지 관념 사이의 구별에 상응한다. 즉 정체성은 해방될 수 있지만, 오직 특이성만이 스스로를 자유화할 수 있다.

339.2 정체성을 지양하는 이러한 혁명적 과정은 괴물스럽고, 폭력적이고, 치명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아를 구하려 하지 말라–너의 자아는 희생되어야 한다! 이는 자유화가 우리를 아무런 동일시의 대상도 없는 무차별적 바다에 던져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정체성이 더 이상 닻으로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 젠더, 혹은 다른 정체성 형태들이 없는 세계의 미지의 바다에 몸을 던지기보다, 벼랑 끝에서 물러나 자신의 지금 모습에 머무르려 애쓸 것이다. 지양은 또한 우리가 앞서 말한 공통적인 것의 부패한 제도들 모두를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종종 지배권력에 맞선 폭력적 전투를 수반할 뿐 아니라, 이러한 제도들이 부분적으로 우리의 지금 모습을 규정하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보다 분명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할 것이다. 혁명은 소심한 겁쟁이의 과업이 아니다. 혁명은 괴물들의 것이다. 너는 네가 될 수 있는 바를 찾기 위해 지금의 너를 잃어야 한다.


저작자 표시

'<Commonweal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3. 반란과 제도  (0) 2010/08/30
6.2.2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0) 2010/08/28
6.1.2 혁명은 괴물스럽다  (0) 2010/08/21
6.1.3 혁명적 아쌍블라주들  (0) 2010/08/21
인간에 대하여 2: 문턱을 넘어서!  (0) 2010/08/07
5.3.2 공화국으로부터의 탈주  (0) 2010/08/03


[340.1]

정체성 정치 ― 실제로는 특이성 정치 ― 의 세 가지 주요한 과제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본 지금, 우리는 특이성들 간의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인종투쟁, 계급투쟁, 젠더투쟁, 섹슈얼리티투쟁들은 서로 어느 정도로 일치하고 어느 정도로 충돌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상이한 정체성 영역들에 공통적인 과제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예속형태와 반란 및 liberation 과정 모두에서 발견되는 평행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제 우리는 갈등과 그것을 다룰 수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340.2]

정체성 정치는 그 자체의 개념상 일정한 분석적 · 정치적 전통 간의 평행이동translation 과정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평행론 ― 인종적 예속의 구조는 젠더적 예속, 계급적 예속 등의 구조와 몇 가지 공통적인 요소들을 공유한다 ― 을 가정한다. 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매우 생산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이러한 평행이동은 같음sameness을 함의하지 않는다 ― 그것을 통해 인종적 위계, 계급적 위계, 젠더적 위계, 섹슈얼리티 위계가 기능하고 또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분석론과 전략들은 질적으로 상이하다. 평행이동은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340.3]

이처럼 공통적인 것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정체성들이 나누어져있고 서로 갈등한다는 것을 부정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상호교차성intersentionality 개념은 두 가지 주요한 측면에서 분할을 부각시키는 데 유용하다. 무엇보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교차한다. 다시 말해 폭력과 위계의 구조들이 흑인 레즈비언이나 아이마라 농민과 같은 특정한 주체들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각각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에 의해 내적으로 분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인종적 위계가 젠더와 계급을 분할하기도 하고, 젠더적 위계가 인종과 계급을 분할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적 다양성이 특이성이 정체성보다 개념적으로 더 적합한 한 가지 이유이다.) 둘째, 다양한 정체성들의 정치적 의제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종종 분할되고 서로 빗나가며 갈등하기까지도 한다. 예컨대 인종적 폭력을 드러내고 그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젠더적 예속에 맞선 투쟁에 반드시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반인종주의 투쟁은, 노동자 투쟁과 마찬가지로 젠더적 예속을 거의 매번 무시하거나 심지어 강화시키기도 했다. 다시 말해 상호교차적 분석이 부각시키는 사실은, 정체성들이 겪는 폭력과 예속의 상호교차적 형태들이 어떤 면에서는 평행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다루는 정치적 기획은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어떤 이들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분석의 맥락에서는, 정체성들의 인정, 긍정, emancipation을 위한 투쟁은 실제로 필연적으로 충돌할지도 모르지만, 특이성들의 liberation 운동들은 평행적인 발전 속에서 서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호교차적 분석은 그러한 이어짐과 평행론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341.1]

스피노자가 제시한 모델에 따라 평행론을 생각하면 사실 평행론은 상호교차성의 교훈들을 파악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 된다. 소위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라는 명제에 의해 정의된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속성은 서로에 대해 자율적이다 ― 정신은 신체가 행동하도록 만들 수 없고, 신체는 정신이 사유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사유의 영역과 연장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발전은 동일한 질서와 연결을 따른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공통적인 실체에 참여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성의 관점에서 정체성 영역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각각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함을 의미한다. 정신이 신체가 행동하도록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이 반드시 젠더 억압을 다루게 되는 것은 아니고, 인종 투쟁이 필연적으로 호모포비아와 이성애규범성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영역에서 특이성들이 수행하는 반란, liberation, 변신의 경로는 동일한 질서와 연결을 따를 수 있다(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모델과 반대로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평행론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평행이동 과정은 이 잠재적인 일치(상응)correspondence를 드러내고 이해해야 하며, 그러한 과정은 각각의 영역의 언어가 갖는 자율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언어들 간의 소통을 촉진시킨다. 그리고 이어짐의 정치적 과정은 저 언어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그것들은 한데 연결해야 한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은 함께 소용돌이치는 반란과 변신을 포함하는 한 떼의 정치적 활동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 떼, 그것의 지성, 내적 조직 등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342.1]

이러한 평행론을 주장하는 것은 분명 어떠한 영역이나 사회적 적대도 다른 영역과 적대보다 우선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정체성 정치가 고무한 다문화주의라는 요즘 유행하는 입장에 반대하면서 계급투쟁은 인종투쟁 및 젠더투쟁과 질적으로 다르다고(그것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인종-젠더-계급이라는 계열은 계급의 경우 다른 정치적 공간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린다. 반인종주의 투쟁과 반성차별주의 투쟁은 타자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위한 노력에 의해 인도되지만, 계급투쟁은 타자를 극복하고 제압하며 심지어 절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이 때 절멸이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계급투쟁은 타자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기능의 절멸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지젝의 주된 비판이 우리가 앞서 언급한 위험, 즉 정체성 투쟁이 소유로서의 정체성에 고착되어 liberation 과정에 참여하지 못할 위험을 제기하는 한에서 지젝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지젝은 계급투쟁이 반인종주의 투쟁 및 반성차별주의 투쟁과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틀렸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정체성에 갇혀서 노동자 정체성을 긍정하고 노동을 찬양하는 수많은 형태의 계급정치를 보아왔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젝이 혁명적 형태의 젠더정치 혹은 인종정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혁명적 계급투쟁이 인간으로서의 부르주아가 아닌 부르주아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기능”(우리는 노동자의 사회정치적 역할과 기능도 덧붙이고 싶다)을 폐지하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페미니즘 정치와 반인종주의 정치도 성차별주의자와 인종주의자 혹은 심지어 가부장제나 백인우월주의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정체성과 인종 정체성의 토대 역시도 공격한다. 그러므로 지젝은 혁명적 계급투쟁과 혁명적이지 못한 인종/젠더 투쟁을 대비시킴으로써 잘못된 비교를 하고 있는 셈이다. 다양한 투쟁들은, 혁명적이지 못한 형태 ― 예컨대 노동자들의 임금요구, 성폭력으로부터의 법적 보호, 예속된 집단들을 위한 사회적 권리나 우대정책 ― 에서는(물론 이러한 형태들은 종종 매우 중요하다) 서로 크게 틀어지고 자주 충돌한다. 그러나 정체성, 소유, 주권을 폐기하고 그리하여 다양성의 장을 여는 혁명적 형태를 취할 때 투쟁들은 평행적이다.

[343.1]

스피노자 식의 평행론은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등등의 목록을 재생산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움(“등등”이 특히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을 쫓아낼 수 있게 해주는 이점 또한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는, 평행적으로 실체를 표현하는 속성들은 무한히 존재하지만, 인간은 그것들 가운데 오직 두 가지 ― 사유와 연장, 정신과 신체 ― 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오직 제한된 수의 투쟁과 liberation만이 인식되고 있지만, 투쟁과 liberation의 경로는 무한히 존재한다고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수, 심지어 무한한 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공통적인 기획에서 평행한 선을 따라 그것들을 절합할 것인가이다.

[343.2]

그러므로 오늘날 이러한 특이성들의 평행론이 혁명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도전들 중 하나는 혁명적 행위는 하나의 영역에 갇혀서는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고 심지어 생각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평행적 발전 없이는 어떠한 혁명적 투쟁도 좌절하거나 뒤로 나자빠지게 될 것이다. 젠더 위계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악화시키는 혁명적 인종 기획은 가로막힐 수밖에 없으며, 인종적 영역에서의 평행적 상응점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계급정치도 실패하고 말 것이다. 다양성과 평행론은 오늘날 혁명적 정치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한다. liberation의 다양한 평행적 경로들은 일치점(상응점)을 따라 나아가거나 아니면 전혀 나아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혁명적 과정은 두 다리로 걷는 것과 비슷한데, 이 때 하나의 다리가 다시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다른 하나의 다리가 발걸음을 떼야만 한다. 하나의 다리만으로 몇 걸음 깡총거리며 걸을 수는 있겠지만, 곧 넘어지고 말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맥락에서는 두 개보다 많은 다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혁명은 오직 지네처럼만,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중으로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을 위한 혁명적 투쟁은 오직 평행론과 다양성으로 구성된 삶정치적 투쟁들의 장에서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343.3]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특이성들의 혁명적 투쟁들을 평행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결코 직접적이거나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이 설명되었기를 바란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우리는 특이성들 간의 마주침과 절합의 논리, 즉 혁명을 운영하는 민주적 조직화와 결정의 논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평행적인 혁명적 투쟁들은 반란적 사건들 속에서 상호교차하는 법을 발견하고, 제도적 형태로 자신들의 혁명적 과정을 지속시키는 법을 찾아야 한다. 이는 혁명적 과정을 관료제적 절차 속에 고정시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구성적 마주침들이 반복할 수 있도록 하고 변형의 과정을 영속적으로 만들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정치적 몸들을 창조함을 의미한다.

[344.1]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비록 오늘날 학자들이 혁명을 근대성과 동일시하고, 애도나 환호를 표하면서 오늘날 혁명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지만, 우리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한다. 2부에서 논의했던 바와 같이 위계, 식민성 그리고 소유에 의해 규정되는 근대성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에, 근대적 혁명은 종국적으로 불가능하다. 근대적 규율과 통제에 저항하는 반근대적 투쟁들조차도 저항을 넘어 세계를 새로이 창조하는 liberation의 과정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근대성과 반근대성 간의 투쟁들에서 나타났던 (너무나 많은!) 혁명적 꿈과 기획들은 결국 근대성 너머를 가리켰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과 특이성들의 다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출현하고 있는 대안근대성만이 혁명에 적합한 유일한 지형이다. 가장 도식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근대성을 규정하는 정체성-소유-주권의 3항은 대안근대성에서 특이성-공통적인 것-혁명에 의해 대체된다. 이제, 마침내 혁명은 시대의 요청이 되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5부 부록 De Homine 2: 문턱을 넘어서!

 

만일 인류로 정말로 윤리학에 관한 책이었던 그런 윤리학 책을 쓸 수 있다면, 이 책은 하나의 폭발과 함께, 세상의 다른 모든 책들을 파괴할 것이다.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윤리학 강연”

 

* (312-1) 전통적인 기업의 가치

- 탈산업시대에 회사의 가치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기업의 가치는 그것의 최초 지출 비용을 계산한 값에다 노동에 들어간 비용과, 재료, 공장유지, 상품운송 등에 들어간 양을 더해서 확립되었다. 이것은 복잡한 계산이겠지만, 모든 것은 복식부기 칸들에 딱 들어맞을 수 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저작자 표시



5.3.2 공화국으로부터의 탈주


301-1. 소유를 보호하고 보필한다는 주된 목적을 갖고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것으로서 출현한 공화국의 형태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북돋우고 그것의 과잉을 규제하며 그것의 이익을 보장하는 등 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지원으로서 오랫동안 기능했다. 그러나 소유의 공화국은 더 이상 자본을 잘 보필하지 못하며 오히려 생산의 족쇄가 되었다. 앞서 우리는 우선 정치적 관점에서, 공화국으로부터의 다중의 탈주와 함께 공화국과 다중의 차이를 검토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동일한 문제에 경제적 생산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물론 삶정치적 시대에 경제적․정치적 과정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긴밀하게 (때때로 식별불가능해질 정도로까지) 얽혀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공화국의 어떤 측면들이 생산적 힘의 발전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가로막는가? 어떤 정치적․사회적 배열들이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이러한 발전을 북돋우며, 자본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섹션에서 생산적 힘의 새로운 팽창과 공통적인 것의 족쇄 없는 생산을 위해―다시 말해 자본을 구하기 위해―자유와 평등의 정치, 그리고 다중의 민주주의가 필요함을 보게 될 것이다.

302-1.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자유가 요구되는데 우리는 그 의미 중 하나를 이미 이전 섹션에서 살펴본 바 있다. 생산하는 주체성인 다중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적/자본주의적 권위나 공적/국가적 권위로부터 자율적이어야 한다. 예전에 생산은 자본가들에 의해 조직될 수 있었고, 심지어 많은 경우 그렇게 조직되어야만 했다. 자본가는 가령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장에 모음으로써, 그들을 기계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그들에게 구체적인 업무를 배정함으로써, 그리고 노동규율(discipline)을 부과함으로써 협력의 수단들을 제공했다. 국가 또한 생산과정에 필요한 협력과 소통의 수단들을 제공함으로써 때때로 동일한 방식으로 생산을 조직할 수 있었다. 공화국이 자본과 맺는 관계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이러한 균형과 양자택일로 특징지워지는데, 그것은 다중에 대한 양자의 권위를 유지한다. 공화국은 때로는 사적인 것에 더 주목하고 때로는 공적인 것에 더 주목했지만, 생산을 조직하는 권위로서 복무한 이 양극은 모두 배타적인 한계였다. 그러나 삶정치적 생산에서, 생산적 주체성인 다중의 조직화에 필수적인 협력과 소통은 내적으로 발생된다. 자본가나 국가가 외부로부터 생산을 조직하는 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반대로, 외부적 조직화에 대한 모든 시도는 이미 다중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자기조직화 과정을 방해하고 부패시킬 뿐이다. 다중은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나아가 새로운 생산적 힘을 발전시키는데, 자신의 용어(terms)로,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협력 및 소통 메커니즘을 통해 그렇게 할 자유가 인정될 때에만 그렇다. 이러한 자유는 사적인 측면에서나 공적인 측면에서나 공히 통제의 기구인 소유의 공화국으로부터의 탈주를 필요로 한다.

303-1. 여기에 필요한 자유는 분명 개인주의적 자유가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으로만, 소통과 협력을 통해서만, 특이성들인 다중에 의해서만 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는 마치 생산하는 모든 주체성들이 동질적인 전체로 통일되었던 것과 같은 집단주의적 자유도 아니다. 이것은 앞서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는 자유의 공간이며 특이한 주체성들간의 마주침을 조직화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던 의미에서 그렇다. 자유에 대한 요구는 계약―시민과 국가 간의 계약이든 노동자와 자본 간의 계약이든―이라는 낡은 정식이 어떻게 점점 생산에 족쇄가 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안보가 복종으로 교환되든 임금이 노동시간으로 교환되든, 계약의 결과는 항상 권위의 성립과 정당화이다. 그 권위는 주체성을 통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약화시키거나 가로막기까지 한다. 계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들의 개인주의 역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 개인들을 역사적․정치적 과정들에 선재하는 것으로 보든 그 결과로 보든 마찬가지이다. 계약에서 개인들은 자신과 비슷한 다른 이들과의 수평적 관계가 아닌, 권위를 가진 인물과의 수직적 관계로 이끌어진다. 개인은 공통적인 것을 결코 생산할 수 없는, 공통의 아이디어와 다른 이들과의 지적 소통이라는 토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다. 다중만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다.

303-2.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생산의 이해관계에 필수적이듯 정치적 평등도 그것에 필수적이다. 위계는 협력 및 소통의 필수적 형태들을 방해하면서 공통적인 것을 분절하고, 사람들을 그것으로부터 배제시킨다. ‘위대한 대화(great conversation)’라는 은유는 삶정치적 생산의 사회적 회로들을 포착하는 관습적인 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지식이나 정동의 생산이 하나의 대화로서 이루어질 때, 한편으로 모든 사람은 이미 동일한 지식․재능․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것을 말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우스꽝스러우며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대화는 생산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차이들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평등이 동일함이나 동질성, 통일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복할만한 가치가 있다. 생산은 차이들이 위계를 이룰 때, 가령 전문가들은 말하기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기만 할 때 역시 제한된다. 삶정치적 영역에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생산적 네트워크에서 각자의 상이한 재능들과 능력들을 갖고 자유롭게 참여할수록 더 효율적이다. 더구나 참여는 생산적 힘을 확장하는 일종의 교육학이다. 관련된 모두가 자신의 참여에 의해 더 능력있게 되기 때문이다.  

304-1. 그러나 위대한 대화라는 은유는 이러한 생산적 관계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데, 그것은 너무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그 관계들을 구성하는 마주침들의 특질에 무관심하다. 많은 사람들은 대화에 참여할 때조차 침묵한다. 그리고 적절한 협력의 수단 없이 단순히 더 많은 목소리들을 추가하기만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불협화음으로 속히 귀결된다. 사회의 현재상태를 보여주는 「신체에 대하여 2」에서 메트로폴리스에 대해 살펴봤듯이, 대부분의 자연발생적 마주침들은 불행하며, 공통적인 것의 부패나 그것의 부정적이고 해로운 형태를 생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생산을 진전시키고 생산적 힘의 확장을 북돋우는 데 필요한 평등은 (최대한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네트워크로의 참여로 특징지워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를 성취하기 위한 행동의 첫 번째 과정은 종종 대화를 깰 것을, 그리고 해로운 관계들과 공통적인 것의 부패한 형태에서 우리 자신을 빼낼 것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파열의 실천은 평등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

304-2. 자유와 평등은 헤게모니의 기초를 형성하는 정치적 대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을 함의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대의의 두 가지 예가 가장 적합한데, 분석을 해보면 이 둘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첫 번째는 다중 바깥에 인민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대의이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훌륭히 설명하듯이, 민중은 물론 본성적이거나 자연발생적인 구성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하는 주체성들의 다양성과 복수성을 지도자, 통치집단, (어떤 경우에는) 중심이념과의 동일시를 통한 통일로 번역하는 대의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된다. 민주적 요구들의 복수성 바깥에 민중적 정체성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헤게모니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라클라우는 명확히 한다. 대의의 두 번째 예는 헌법적 수준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데, 그것은 대의하는 자와 대의되는 자들 간의 이접적 종합을 작동시킨다.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은 대의되는 자들을 정부에 연결시킴과 동시에 정부로부터 그들을 분리해내도록 고안된다. 대의되는 자들로부터 대의하는 자들을 분리해내는 것 또한 헤게모니의 기초이다. 이 두 가지 예에서 대의와 헤게모니의 논리는 민중이 그 지도(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귀족정을 선출하는 것은 민중이지만, 이러한 배열이 (민주정의 통치형태가 아니라) 귀족정의 통치형태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305-1. 그러나 삶정치적 생산에 대한 요구는 정치적 대의 및 헤게모니와 직접적으로 갈등한다. 대의라는 행위는 정체성을 구축함에 있어 특이성들을 가리거나 동질화하는 한, (우리가 앞서 말한) 필수적인 자유와 복수성을 약화시킴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제한한다. 민중은 현존하는 공통적인 것을 보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예들을 생산하는 데는 다중이 (그 마주침, 협력, 특이성들 간의 소통과 함께) 필요하다. 대의하는 자와 대의되는 자들 사이의 분할을 통해 만들어진 헤게모니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대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든 위계들만 삶정치적 생산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중의 외부로부터 다중을 부패시키고 제한하는 생산과정에 대해 행사되는 헤게모니나 통제의 모든 예들 또한 삶정치적 생산을 약화시킨다. 

305-2.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생산적 힘의 확장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자본의 삶정치적 위기를 면하고 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생산자들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를 하나 더 수반한다. 그것은 생산을 조직하고 협력과 소통의 형태들을 창조하며 혁신으로 나아갈, 결정의 힘이다. 생산과정에 개입하고 그것을 조직함으로써 혁신하고자 하는 개별자본가나 심지어 자본가 계급의 어떠한 시도도 공통적인 것을 부패시키고 그 생산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기업가’라는 신화는 계속된다. 우리가 그 대신 일으켜야 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정신, 즉 다중의 기업가정신이다. 그것은 결정의 힘을 함께 부여받은 생산하는 주체성의 민주주의 속에서 작용한다. 

306-1. 결국, 소유의 공화국으로부터의, 생산을 둘러싼 명령의 위계로부터의, 그리고 다른 모든 사회적 위계들로부터의 다중의 탈주가 아마도 공통적 결정의 가장 중요한 예일 것이다.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표결인가? 우리는 아직 그러한 민주주의의 구조와 작용을 기술할 지점에 있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구축이 자본의 질병을 고치고 삶정치적 생산의 확장을 북돋우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5.3.3 내진 보강: 자본을 위한 개혁주의 프로그램


[306-3] 우리의 분석은 자본이 파멸의 길에 놓여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 파멸은 무엇보다도 전지구적 환경과 극빈층 주민들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본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자본은 죽음의 질주로부터 구출될 수 있을까? 자본의 질병에 성공적 처방을 제시한 마지막 경제사상가는 존 매너이드 케인즈였다. 그의 저작을 기초로 하여, 국가의 생산규제, 생산자를 위한 복지제도, 유효 수요 창출을 위한 자극, 다양한 여타의 구제책들을 위한 체제들이 발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오늘날 삶정치적 시기에 이러한 낡은 처방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때로는 나아가 실질적으로 질병을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개혁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주장을 기초로 하여, 유익한 개혁들의 목록을 제안하는 것은 어렵지는 않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것에는 역설적인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첫째로, 전지구적 귀족정이 오늘날 의미 있는 개혁들을 만들어 낼 수 있거나 어떤 실질적인 방법으로 파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런 개혁이 실제로 실행된다면, 그것은 자본의 질병을 치료하는 동시에, 또한 직접적으로 새로운 생산양식을 향해 자본을 넘어서는 경향을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오래된 이디시의 농담을 상기시킨다. 물음: 한 까마귀(crow) 사이에서 차이는 무엇일까요? 답: 왼쪽을 제외하고 그 두 날개는 길이가 동일하다.
이 동일한 역설적 정신을 갖고 진행해 보자. 우리는 가능한 한 논리를 통해서 작업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의미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러나 작업하는 내내 그것은 결국 말이 안되게 붕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307-2]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자본주의의 위기들은 오늘날 그 객관적 모습―신용 위기, 인플레이션, 경기불황, 치솟는 에너지 가격, 폭락하는 집값, 통화 위기들, 환경 황폐화 등등―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그 주관적 모습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무수한 장애들이 생산적 주체성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공통적인 것의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들과 그것의 부패시키는 것, 생산적인 만남을 조직화하며 함께 창조할 필수적인 것의 부족 등등. 필수적인 가장 긴급한 개혁은,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정신을 계발하기 위한 필요와 협력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의 혁신을 제공하기 위한 필요이다. 우리는 전지구적 귀족정이 우리에게 조만간 조언을 요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본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한 개혁들이 여기에 있다.

 

[307-3] 개혁의 첫 번째 집합은 삶정치적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기반(infrastructure)을 공급하는 데 맞추어진다. 가장 분명한 것은 적절한 물리적 기반에 대한 요구인데, 그것은 세계의 대부분에서 결여되어 있다. 세계의 종속 지역의 주요 메트로폴리스에서, 막대한 주민들은 깨끗한 마실 물, 기본적 위생 환경, 전기, 적절한 음식물에 대한 접근과 삶을 지속하기 위한 여타의 물리적 필요들이 부족한 유독한 환경 속에서, 죽음의 경계에서 비참함을 인내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아킬레 음벰베(Achille Mbembe)가 제안하듯이, 이것은 사회적 삶과 물리적 삶을 지배하게 때문에 삶정치라기보다 죽음정치라고 불러야 한다. 환경의 황폐화는 적절한 음식,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생존을 위한 여타의 필요에 접근하는 데 중심적 장애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기반을 공급하는 것은 또한 바로 환경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확실히 자본은 일정한 사람을 일회용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삶정치적 경제에서 생산적이려면, 모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308-2] 그런데 벌거벗은 삶은 삶정치적 생산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 생산적인 주체성들을 지지하는 데에는 사회적이며 지적인 기반도 필요하다.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주요한 도구는 더 이상 회전하는 방직기나 조면기(cotton gin, 목화씨를 빼내는 기계) 또는 금속 프레스가 아니라, 오히려 유대를 구축하기 위한 언어적 도구, 정동적 도구, 생각을 위한 도구, 등등 이다. 물론 인간은 예전에도 두뇌, 언어능력, 유대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계발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전 시기보다 기본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이 삶정치적 경제에서 더 중요한 이유이다. 모든 이들은 언어, 코드, 생각과 정동과 함께 일하는 방법―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본래 타고 나는 것은 없다. 전지구적 교육 발의(education initiative) 같은 것이 제도화되어야만 하는데, 그러한 것은, 읽고 쓸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하여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고등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의무교육으로 제공된다.

 

[308-3] 사회적이고 지적인 기반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귀결로서, 열린 정보와 문화의 기반은 다중이 타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협동하는 능력을 실천에 옮기고 완전히 계발하기 위해, 구축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기반은 (유무선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을 포함한) 열린 물리적 층위, (오픈 코드와 프로토콜과 같은) 열린 논리적 층위, 그리고 (문화적, 지적 그리고 과학적 저작과 같은) 열린 내용 층위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한 공통적 기반은 특허, 저작권과 여타의 비물질적 소유 형식을 포함하는 사유화의 메커니즘에 맞서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존의 생각, 이미지, 그리고 코드의 저장고(reserve)에 관여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열린 접근은 의료와 여타의 과학적 연구 결과와 같은 모든 필수품이 모두에게 적절한 비용으로 이용가능하다는 것을 보증하는 이점 또한 있다.

 

[308-4] 다른 필수적인 기반적 개혁은 진보적인 연구에 관한 기술적 요구에 응하는 충분한 기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특허를 주장하는 논의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그것에 의해 생산적인 능력들을 감소하더라도, 법인은 연구와 개발을 유지하기 위해 이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 유형들―의학, 제약, 컴퓨터 공학, 재료 공학 등―이 대규모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실제로 사실이다. 특허와 저작권에 의해 발생한 거대한 이익이 수탈당한다면, 그러한 연구를 유지하기 위해, 사적이고 공적인 제도를 통해 또 다른 기금의 원천은 공급되어져야 한다.

 

[309-2] 게다가 물리적, 사회적, 비물질적 기반에 관한 개혁을 위해, 개혁의 또 다른 집합은 삶정치적 생산을 위해 요구받는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 첫 번째 필수적인 자유는 이동의 자유인데, 그것은 국가적 경계 속에서 그리고 가로질러 이주할 수 있는 자유와 또한 한 장소에 머무를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앞서 우리의 분석을 통해 몇몇 지점들을 살펴보았듯이, 삶정치적 생산성은 유익한 마주침을 조직화하고 해로운 관계와 공통적인 것의 해로운 형식에서 빠져나오는 능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동의 자유는 다중이 가장 창조적일 수 있는 곳, 가장 기쁨에 찬 마주침을 조직할 수 있는 곳, 가장 생산적인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곳으로 흐를 수 있게 하면서, 공간의 자유를 형성한다. 열린 시민권이라는 형식을 확립하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자유를 뒷받침하며 그리하여 삶정치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309-3] 자유에 관한 두 번째 개혁은 시간에 관한 것인데, 우리의 삶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직장에서 소비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장의 명령을 포함하여 삶정치적 노동의 자율성에 관한 모든 침해는 생산성에 대한 장애물이다. (실제로 삶정치적 시대에, 당신들이―공장에서, 들판에서, 사무책상에서, 콜센터에서 일하면서―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는가를 측정하는 것은 착취에 관한 좋은 측정법이다.) 시간의 자유를 주는 개혁은 국가적 혹은 전지구적 규모에서 노동여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지급하는 최소보장소득의 확립(제도화)이다. 노동에서 소득을 분리하는 것은 모두가 시간을 좀 더 제어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저자들은 경제적 정의(부는 광범위하게 산재된 사회적 네트워크를 가로질러 생산되며, 따라서 그것에 상응하는 임금도 동일하게 사회적이야 한다)와 사회적 복지(오늘날 경제에서 완전고용은 달성될 수 없기 때문에, 소득은 또한 직업이 없는 이들에게도 제공되어야 한다)에 기초한 보장소득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인구가 삶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이 자본의 이익을 어떻게 보장하는지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다중의 자율성과 시간에 대한 통제를 부여하는 것은 삶정치적 경제에서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310-2] 삶정치적 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자유는 또한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고, 자율적인 사회 제도를 창출하는 힘을 포함한다. 그러한 능력들을 개발하기 위한 하나의 가능한 개혁은, 다중이 사회적 협력과 자기통치를 배울 수 있도록, 통치(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참여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확립하는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주장했듯이, 통치(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들의 능력을 개발하고, 그들의 욕구를 더 자극하는 자기-통치의 교육이다. 민주주의는 당신이 행동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310-3] 이것들은 자본주의 생산을 구하기 위한 필수적인 몇 가지 개혁이며,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거대한 금융과 경제 위기에 직면할 때조차, 경제적 관계를 통제하는 전지구적 귀족정이 그러한 개혁들을 기꺼이 제도화하거나 그럴 수 있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 사회적 삶을 위한 물리적이고 비물질적인 기반을 요구하는 무수한 투쟁들은 이미 시작되었고, 다중의 자유와 자율성을 위한 투쟁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개혁들을 성취하기 위해 개발되고 강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310-4] 어떤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우리의 혁명적인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는 자본을 구출하기 위해 개혁들을 제안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행에 관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작업 중이다. 확실히 우리의 작업은,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좋아진다”(“The worse things are, the better things are”)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파국적 위기로부터 야기되는 자본주의적 지배의 종말과 뒤이어 어쨌든 그 폐허로부터 완전히 새로 생겨나는 경제 질서를 제시하는 붕괴이론들과는 상이하다. 우리의 작업은 또한 사회적 생산의 국가적 규제, 통제, 관리를 증가시키면서,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부와 통제의 이전을 예견하는 사회주의적 이행 관념과도 다르다. 대신에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이행의 성격은 사적이고 공적인 통제 모두로부터 얻는 점증하는 다중의 자율성을 요구한다. 협력, 커뮤니케이션, 사회적 마주침의 조직화 속에서 교육과 훈련을 통한 사회적 주체들의 변형을 요구하며, 그리고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점진적 축적을 요구한다. 이것은 자본이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을 창출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자신의 관심을 추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인데, 이것은 생산적 다중의 증가하는 힘과 자율성을 촉진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힘의 축적이 어떤 문턱을 넘을 때, 다중은 공통의 부를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능력을 가지고 출현할 것이다.



연구공간 L Commonwealth 세미나

 

5.3 단층선에서의 전진(前震)들

 

자본의 모양새는 [자본의 미래적 발전에 대한] 예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문명들은 그들의 유망함에 대한 척도를 충분히 채울 시간을 갖기 전에 사라졌다. 나는 그 성과의 강력함 위에서 자본주의 간주곡이 연장될 것 같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정확히 반대 추론을 하고자 한다.

―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5.3.1 자본의 예후

 

[296.1] 모든 것이 자본과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치료로는 그것의 질병을 고칠 수 없다. 사적 신자유주의적 의술도 공적 국가중심적 처방도 아무런 긍정적 효과가 없으며, 사실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우리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환자를 사망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새로운 치료법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결국 안락사가 가장 인도적인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에 양심적인 의사는 올바른 진단을 하고 성공적인 처방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296.2] 그 위기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자본이 괜찮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저 모든 점점 더 부유해지는 사람들을 보라! 주식시장이 어떻게 되살아나는지를 보라! 저 모든 생산된 상품들을 보라! 슘페터가 이 절의 제사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윤율 등과 같은 성과에 대한 이러한 관습적 판단이 건강을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자본은 불멸이 아니며, 다른 모든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태어났던 것이며 또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관련 있는 증상들을 식별하여 그것들이 어떻게 다루어질 수 있는지를 평가하고 자본의 예후에 도달하는 것이다.

 

[297.1] 반세기 전 슘페터가 진단한 증상은 자본의 기업가적 능력의 쇠퇴이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19세기 모델들에 둘러싸여 작업하면서 슘페터는 기업가정신을 자본의 활력으로서 찬양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가적 기능의 본질을 위험 부담으로 오해하는데, 슘페터는 위험 부담은 단순히 투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슘페터의 기업가는 창조의 기쁨에 의해 추동된 새로움, 혁신을 도입하는 자이다. 이것이 자본에게 그 끊임없이 전진하는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점증하는 관료제적 기업 문화를 분석하면서 슘페터는 자본의 기업가적 기능의 노화와 그것의 기계화되고 판에 박힌 경제 성장 형태에 의한 대체를 예견한다. 슘페터는 혁신과 기업가정신을 소실할 경우 자본이 오래 생존할 수 없다고 본다.

 

[297.2]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컴퓨터 시대에 자본의 기업가적 기능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에 의해 다시 발명되고 다시 고무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미디어를 위해서는 일부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슘페터적 의미에서의 기업가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판매원이며 투기꾼이다. 그들은 최근 버전의 아이팟과 윈도우를 팔기 위한 기업의 얼굴이고, 그 성공에 대한 그들 재산의 몫에 내기하지만, 그들이 혁신의 중심인 것은 아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은 기업과 그 고용원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확장되어 있는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 생산자의 광대한 네트워크에서 출현한 혁신적 에너지를 먹으면서 생존하는 것이다. 삶정치적 생산은 사실 다중적 기업가정신에 의해 아래로부터 추동된다. 슘페터는 경제 혁신의 원천인 자본주의 기업가의 노화에 관해 옳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대신하여 히드라 머리를 가진 다중이 삶정치적 기업가로 출현한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없었다.

 

[298.1] 이것은 우리에게 자본의 질병의 두 번째 증상, 즉 자본이 생산력에 참여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함을 가리킨다. 맑스와 엥겔스가 유럽에서 봉건적 생산관계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의 오랜 이행을 기술할 때, 그들은 생산력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봉건적 관계가 점점 더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자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교환관계가 생산력을 촉진하며 그것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박차를 가하기 위해 출현한다. 자본을 포함한 모든 생산양식은 처음에는 강력하게 생산력을 확장시키지만 결국에는 그것들을 저지하고 그리하여 다음 생산양식의 토대를 낳는다. 이것은 궁핍화 테제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전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가가 아니라 사람들의 능력과 잠재력이 보다 더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가이다.

 

[298.2] 오늘날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는 점점 더 차꼬가 되고 있다. 누군가는 자본의 발전이 높은 수준에서 지속하고 있다고 반대할지 모른다. 가령 2년마다 디지털 전자 장치의 속도와 역량이 두 배로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성과에 대한 이와 같은 척도는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하지 않는다. 생산력의 발전은 주로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주체적 힘과 관련하여 측정되어야 하며, 사실 이에 대한 과학적 측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의 능력과 창조성이 최고도로 충만하게 길러지고 발전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삶이 낭비되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 있어 그것이 생산양식의 건강이 평가되어야만 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인구의 너무도 많은 부분의 능력을 구속하고 있다는 점증하는 신호를 본다. 지배적인 지역에서는 종종 ‘고용 없는 성장’을 듣게 되며, 종속적인 지역에서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본의 관점에서는 무용한 ‘일회용’이 되고 있다. 그리고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본에 고용된 사람들의 대다수에게는 그들의 충만한 생산적 능력의 발전이 허용되지 않으며, 그 대신 그들의 잠재력과는 상관 없는 판에 박힌 일들에 제한된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삶정치적 생산의 맥락에서 이는 완전 고용 혹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은 오히려 생각하고 창조하며 이미지와 사회적 관계를 발생시키고 소통하며 협동하는 우리 힘의 확장을 기르는 것과 관련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마치 자본은 인구를 위해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가 있다는 식의 도덕적 비난으로 제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상황을 도덕론자가 아니라 환자의 건강을 평가하는 의사로서 보고자 한다. 그것이 존재하는 생산력들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없으며 그것들의 성장을 조성할 수 없다는, 인구의 재능과 능력을 낭비한다는 사실이, 경제 체계 내 질병의 중요한 증상이다.

 

[299.1] 자본의 질병의 이러한 증상은 자본 축적의 반복하는 위기로 귀결한다. 2008년에 시작한 거대한 재정 위기와 경제 위기는 이 사실에 광범위한 주의를 다시 기울였다. 전통적으로 자본의 위기는 객관적인 관점들로 인식된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에서 생산-유통-실현-다시 생산이라는 회로의 봉쇄를 강조한다. 화폐 형태이든 상품 형태이든 가치가 회로의 어떤 지점에서 하릴없이 서 있을 때 ―가령 노동 부족 때문이든, 생산을 중단시키는 파업 때문이든, 유통을 가로막는 운송 교착 때문이든, 혹은 상품을 팔기에 그리고 가치와 이윤을 실현하기에 불충분한 수요 때문이든― 위기가 생긴다. 하지만 오늘날의 위기는 주체적 관점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아이디어, 정동, 코드, 지식, 정보 그리고 이미지와 같은 삶정치적 상품은 그것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여전히 유통되어야 하지만 이제 그 유통은 생산 과정에 내재적이다. 삶정치적 회로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 안에 모두 포함되는데, 공통적인 것의 생산은 동시에 주체성의 생산이자 사회적 삶의 생산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관점에 따라서 공통적인 것을 통한 주체성의 생산이자 주체성을 통한 공통적인 것의 생산 양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삶정치적 회로의 위기는 주체성 생산의 봉쇄로서 혹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성의 장애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300.1] 어느 날 MC(Monsieur le Captial)가 아파서 DS(Doctor Subtilis)를 방문하며 그가 매일 밤 되풀이되는 꿈으로 괴롭다고 말한다. 꿈속에서 MC는 그가 햇살에 반짝이는 잘 익은 과일이 풍성한 나무 앞에 서 있지만 그의 팔이 관절염이 걸려서 낮은 가지의 과일조차도 딸 수 있을 만큼 팔을 들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허기에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 앞에 있는 맛난 과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결국 각고의 노력으로 과일 하나를 가까스로 따지만, 그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말라 죽은 인간의 머리를 쥐고 있음에 질겁한다. 이게 무슨 의미요, DS? DS는 MC의 문제가 단순히 의식의 불안이 아닌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주체와 객체 사이의 전통적인 분할은 붕괴한다. 주체가 더 이상 이후에 주체를 재생산하는 객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을 통해서 주체가 동시에 주체를 생산하며 재생산하는 일종의 단락(short circuit)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MC가 그의 손에 쥐고자 한 것은 바로 주체성 자체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비극적으로, 주체성의 생산에 손을 댐으로써 MC는 공통적인 것을 파괴하고 그 과정을 부패시키며 생산력을 시들게 만든다. 물론 MC는 이러한 진단에 너무도 당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에게 치료를 강요한다. DS는 사적 공적 통제, 신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전략이라는 낡은 의술이 단지 사태를 더 나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숙고 끝에 DS는 수수께기로 대답한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과일에 손대지 마십시오.

 

[301.1] 자본의 미래에 대한 우울한 예측을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붕괴론이라 불리는 자본주의 종말론에 대한 그와 같은 낡은 관념에 추파를 던지지 않는다. (붕괴론은 부르주아지를 겁먹게 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열정을 고무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사실 오늘날 심지어 극적인 위기에 직면하면서도 자본의 궁극적 사망을 감히 말하려 하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파국론자로서 묵살되는 것 같다. 우리는 종말론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기본적인 가정과 함께 자본의 질병의 징후를 독해하는 것이다. 자본이 영원토록 지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은 그 자신의 지배를 추구하면서 결국에는 그것을 승계할 생산양식과 사회의 조건을 창조할 것이다. 이는 봉건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랜 과정이다. 그것이 중요한 문지방을 넘어가는 것이 언제일 지를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미 ―삶정치적 생산의 자율성,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 그리고 그것의 자본의 착취와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에서― 낡은 것의 껍질 안에서의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인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