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혁명을 다스리기(Governing the Revolution)
혁명적인 법은 그 목적이 혁명을 지속하며 그 과정을 가속화하거나 조절하는 데 있는 법이다.
꽁도르세, 『혁명적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On the Meaning of the Word Revolutionary
6.3.1. 이행의 문제
[361: 1] 너무나 많은 혁명적 사유가 수행해야하는 희곡의 모든 막을 등한시하고 전주곡에만 주의를 기울이면서, 이행의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않는다. 지배 권력의 타파, 구체제의 파괴, 국가 장치의 분쇄―자본, 가부장제, 백인우월주의의 전복일지라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사람들이 다중의 형성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어떻게든 현대 사회의 위계화와 부패를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다수다양성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서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는다면―요컨대 민주주의 사회가 이미 완비되었다면―그것으로 아마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래,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도 권력 구조를 파괴하는 반란의 사건으로 충분할 것이며, 압제의 멍에 아래에 이미 존재하는 완성된 인간사회는 자발적으로 번영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인간 본성은 완성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모두 정체성들, 위계화들, 그리고 부패들과 같은 현재의 권력 형태들 속에 얽혀있고, 연루되어 있다. 혁명은,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이, emancipation뿐만 아니라 liberation을 요구한다. 즉 파괴라는 사건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길고 지속적인 변형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이행에 관한 문제이다. 즉 어떻게, 반란적인 사건을 확장시켜서 해방과 변형의 과정으로 만들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362: 2] 다음과 같이 꽁도르세 선언하고, 한나 아렌트는 약 2백년 이후에 그를 되풀이 한다. “‘혁명적이라는’ 단어는 자유를 목표로 하는 혁명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혁명들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해야 하고, 그리하여 혁명적 이행의 방향과 내용은 다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능력의 증가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사람들people은 본래부터 공통적인 것을 함께 관리하고, 서로 협동하는 능력을 자연발생적으로 갖추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두 보이스(W. E. B. Du Bois)는 미국 시민전쟁 이후 재건시대의 약속들, 배신들, 그리고 실패들을 연구하면서, emancipation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달았다. 미국 정부와 몰수당한 남부 노예소유자의 모든 함정과 속임수에 더하여, 그리고 남부로 이주한 북부의 자본가들에 의해 창출된 인종적, 계급적 위계들에 더하여, 두 보이스는 또한 노예제도 폐지 이후에도 막대한 대다수의 인구는, 즉 백인과 흑인을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능력들이 부족하여, 여전히 가난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Emancipation은 시작일 뿐이다.
[362: 3] 근대 혁명적 사유의 연대기에서, 레닌은 혁명적인 이행에 관해서는 가장 표준적인 전거를 제공한다. 우리가 앞에서 서술했듯이, 레닌은 지금과 같은 인간 본성은 민주주의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한다. 그들의 습관, 판에 박힌 일, 심성, 그리고 일상의 무수한 모세혈관적인 실행 속에서, 사람들은 위계, 정체성, 인종차별, 그리고 공통적인 것의 일반적인 부패한 형식들에 매몰되어 있다. 그들은 아직 주인, 지도자, 그리고 대표자들 없이는 민주주의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레닌은 두 부정으로 이루어진 변증법적 이행을 제안한다. 먼저, 독재 기간에는 사회를 지휘하고 주민을 변형시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부정해야 한다.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일단 창조되기만 하면, 독재는 부정될 것이며 새로운 민주주의는 성취될 것이다. 레닌은 명쾌하게 문제를 설정한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변증법적 해결책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마땅히 의심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행적 독재”가 민주주의로의 변증법적 전도에 저항하면서 권력에 매우 집요하게 집착했기 때문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독재의 사회적 구조는 다중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민주주의의 훈련training을 촉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독재는 종속을 가르친다. 민주주의는 행위함으로써만 학습될 수 있다.
[363: 2] 이행의 문제에는, 민주주의적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로 인도하는 긍정적이고 비변증법적 해결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앞 절에서 우리의 분석은 이미 민주주의적 이행을 위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를 계발하였다. 우리가 설명한 반란적인 사건은, 민주주의적 결정을 형성할 수 있는 다중의 능력을 계발하는 제도적 변형 과정 속에서 통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중의 형성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적 조직화의 기획이다. 이 이행이라는 관념은, 마지막 순간에 스펙트럼의 맞은편 끝으로 그 과정을 밀어붙이는 변증법의 부메랑 효과에 의지하기보다는, 점근선적 접근으로 그려진다. 그 점근선적 접근에서는, 운동이 결코 결론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이행과 목표 사이의, 수단과 목적 사이의 거리는 그것이 중요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극소해질 진다. 이 과정은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하고 혁명을 불확정적인 미래로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낡은 개혁주의적 환영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기는커녕, 현재 사회 그리고 지배권력과의 단절은 발본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반란이 이행의 과정에서 일소되는 만큼, 이행은 끊임없이 반란의 힘을 갱신해야 한다. 달리 말해, 현재 사회의 국가를 평가하는 가운데, 핵심은 유리컵에 절반이 비었는가, 남았는가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리잔을 박살내는 것이다!
[363: 3] 그러나 우리가 말했듯이, 이행 과정은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이행은 어떻게 통치govern될 수 있을까? 무엇이 혹은 누가 이행을 인도하는 정치적 사선(斜線)을 그어낼 수 있을까? 어쨌든 정치적 선은 항상 일직선이지도 않고 당장 명확하지 않으며, 모호한 곡선을 통해 사선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러한 물음들은 우리를 전위, 지도, 그리고 대표와 같은 딜레마로 되돌아가게 한다. 혁명적인 운동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중들을 대표하는 매력적인 인물들이나 지도 그룹―당, 혁명정부, 평의회, 이사회 등등―에 의한 지배와 조종 과정을 허용해 왔다. 그리고 혁명적인 투쟁 속에서, (노동 과정에서 상위의 지식, 의식이나 지위를 지닌) 하나의 사회적 그룹에 다른 사람들을 제어하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앞서 말한 잠재적인 평행주의 깨트리는, 지도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여러 차례 들어왔는가? 산업노동자들은 소작농을 지도해야 한다고, 백인노동자들은 흑인노동자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종종 지도의 체제화는,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사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에 관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주장에 의해 수행되었다.
[364: 2] 우리의 논의는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편 이행의 과정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정치적 사선에 따라 유도되어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 그 과정을 통제하기 위해, 어떤 사회적 정체성이나 전위 그룹이나 지도자를 인정하는 것은 이행이 제공해야 하는 민주주의적 기능을 침식시킨다. 한 측면에서는 무력함과 무질서의 위험과, 다른 측면에서는 위계화와 권위의 위험 그 사이를 걸어 갈 수 있는, 혁명적인 과정을 위한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364: 3]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는 방법은 정치적 사선을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으로 되돌리는 것, 즉 그것을 사람들이 이미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고 특히 삶정치적 생산 과정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능력들에 관한 조사에 근거 짓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제안한 어법으로 말하면, 이것은 다중의 잠재적인 정치적 구성을 발견하기 위해 생산적 다중의 기술적 구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3장와 5장에서 행해진 경제적 분석들에 관한 정치적 결말을 얻는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삶정치적 맥락에서 커뮤니케이션과 협력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한, 생각, 이미지, 코드, 언어, 지식, 정동, 등등의 생산은, 자율적인 공통적인 것의 생산으로, 다시 말해 삶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삶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은 바로 정치적 행위에 관한 정의이다. 이것은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행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로, 삶정치 생산의 자율성은, 여전히 자본의 명령 하에서 지시받고 강요받고 있어서, 부분적으로 자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경제적 능력들은 바로 정치적 능력들로 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의 공통적 짜임 속에―이행의 정치적 사선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다중의 능력처럼―잠복적, 잠재적 유충으로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행위와 조직을 수단으로 한 이러한 잠재적인 것의 현실화는 교차하는 반란적인 사건을 통해서 평행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투쟁들을 공통적인 것의 관리라는 제도적 과정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365: 2] 안토니오 그람시의 “수동 혁명”이라는 관념과 그 한계는 우리에게, 정치적 사선과 삶정치적 다이아그램 간의 관계가 이행의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루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람시가 많은 핵심 개념들을 가지고 작업할 때처럼, 그는 다각적 관점을 통해 개념에 좀 더 넓은 진폭을 부여하면서 “수동 혁명”을 다양한 맥락에서 약간씩 다르게 사용한다. 그의 첫 번째, 그리고 주요한 용법은 19세기 이탈리아 부르주아 사회의 수동적 변형을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능동적 혁명적인 과정과 대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람시는 수동 혁명은 혁명없는 혁명, 즉 주체성 생산을 위한 강력한 과정이 중심적으로 드럼남이 없는 정치적 구조와 제도적 구조의 변형이다. 사회적 행위자들보다 오히려 “사실”이 실질적 주인공이다. 둘째로, 그람시는 또한 “수동 혁명”이라는 용어를, 1920, 30년대의 미국 공장 시스템의 발달 속에서 주요하게 인지한 자본주의적 경제 생산 구조의 변화에 사용한다. “아메리카니즘”과 “포드주의”는 맑스가 자본 내의 노동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이라고 부른 것의, 즉 정확히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자본의 구조적 변형이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고, 강력한 주체에 의해 가동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이다. “수동 혁명”을 역사 분석의 서술적 도구로서 사용한 이후에, 자본주의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변화 모두를 고려하면서, 그람시는 세 번째로, 그것을 투쟁을 위한 경로를 시사하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우리는 자본 안에 종속된 사회에서 혁명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람시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대답, 즉 시민사회의 제도를 통한 긴 행진이다.
[366: 2] 그람시의 다양한 정치적 제안들은 레닌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자의 비판으로서 합체한다. 그는 “기동전”이 아니라 “진지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달리 말해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인 타격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로부터 헤게모니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 속에서, 문화와 정치적 영역에서의 확장된 일련의 전투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레닌주의에 비판적이다. 19세기 이탈리아 부르주아지나 20세기 프롤레타리아에 있어서 수동 혁명은, 능동적인 혁명보다 우수한 것이 아니라, 최선이 불가능할 때, 그리고 혁명적인 과정을 이끌 능동적인 주체가 없을 때, 단지 대안일 뿐이다. 진지전, 헤게모니 그리고 수동 혁명을 포함하는―그람시의 정치학의 모든 핵심적 사유는 비혁명적 시기동안, 혁명적인 활력의 창안을 목표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언젠가 이것이 가능하게 될 때, 이것은 능동적 혁명의 지평으로 향하게 된다.
[366: 3] 따라서 그람시는 여러 면에서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의 예언자이다. 그는 적어도 산업노동자들의 소작농에 대한 “지도”에 관해서는, 산업노동자들의 전위가 더 이상 능동적 프롤레타아적 혁명의 주체로서 임무를 다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노동자 전위가 바람직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또한 그람시는 포드주의에서 자본 아래로의 사회의 포섭이 프롤레타리아의 기술적 구성의 변형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리고 그는 결국, 삶정치적 다이아그램 속에서,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사이의 분할을 깨뜨리며, 그리고 문화적이고 사회적 관계들을 직접적으로 경제적 가치와 생산의 영역으로 가져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공장벽을 넘어서 사회전체 영역을 포위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새로운 기술적 구성이 새로운 주체성의 생산을 함의한다는 점을 파악하기도 한다. 즉 “미국에서 [산업]합리화는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생산 과정에 적합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공들여 만들 필요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람시는 삶정치적 다이아그램의 개발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적 사선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했다. 혁명적인 제도에서 다중의 형성 그리고 다중의 민주적 의사결정능력이 혁명적 제도들로 구성되고 공고화되는 것이, 정확히 그람시가 수동 혁명보다는 오히려 능동 혁명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는 주체성의 생산과 같은 종류이다. 삶정치적 지형에서 레닌주의 그람시로의 그러한 회귀는 우리가 그람시의 사유의 겉보기에 분기하는 가닥들을 모으는 것을 허용한다. 우리는 양자택일―반란인가 제도적 투쟁인가, 수동 혁명인가 능동 혁명인가―에 직면해 있지 않다. 대신에 혁명은 동시에 반란과 제도, [하부]구조적 변형과 상부구조적 변형이기도 하다. 이것이 다중의 “군주되기”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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